누가 그렇지 않으랴만 상처에 유독 민감한 예술가들이 있다. ‘흰’을 쓴 작가 한강도 그런 예술가에 속한다.
‘흰’이 형상화하는 상처는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것이 아니다. 태어나서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와 관련된 것이니 상처는 어머니의 것이라고 해야 맞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작가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의 상처가 된 건 어머니의 이야기가 마음에 얹히면서부터다. 혼자서 아이를 낳고 아이의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풀이해 들으면서, 어머니의 상처와 아픔은 자신의 것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두고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그의 작품 제목 ‘흰’은 죽은 딸의 얼굴색을 가리키는 어머니의 형용사를 차용한 것이었다. ‘하얀’이라는 색깔과 대비되는 상처와 아픔과 애도의 색깔.
그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 때의 일이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실화를 읽게 되었다. 벨기에인 가정에 입양되어 살던 유대인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 사람에게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수시로 들리는 거였다. 그는 열여덟 살이 되면서 자신에게 여섯 살에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 죽은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폴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나치에 체포되기 직전에 공포에 질린 형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형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이야기를 읽고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는 언니를 떠올렸다.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도 벨기에 남자의 형처럼 영혼이 되어 동생인 자신을 찾아왔을까. 찾아왔다면, 두 시간 만에 죽어 언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 말도 못했을 텐데 어떤 형태로 찾아왔을까. 궁금했다. 그 영혼에 귀를 기울이고 목소리를 빌려주고 싶었다. 그 결과가 ‘흰’이었다. 애도의 본질과 윤리가 무엇인지 증언하는 한강식 애도일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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