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별 문화의 속살 깊이 들여다보는 창, 공연[광화문에서/손효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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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갑자기 불이 켜졌다. 공연장으로 남성 직원들이 들어오더니 객석 뒤쪽을 향했다. 솔직히 이것도 공연의 일부인 줄 알았다. 연극이 워낙 전위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다리가 완전히 풀린 중년 백인 여성을 직원들이 양쪽에서 부축해 데리고 나간 후에야 공연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깨달았다. 수년 전 오스트리아 빈 페스티벌에서 여우에 대한 서양의 전설을 다룬 ‘판 덴 보스’를 보다가 겪은 일이다.

극 중 남녀 배우가 유리벽 뒤로 들어가자 영상이 켜지며 바닷가 절벽이 펼쳐졌다. 둘은 키스하는 듯하더니 여성이 이로 남성의 얼굴 살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남성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방금 눈앞에서 본 이들이 커다란 화면에서 이런 행위를 하자 영화에 비해 충격이 배가됐다. 여성 관객이 실신한 건 이 장면 직후였다. 막이 내리자 형식적인 박수가 나왔다. 로비에서는 한 20대 여성이 펑펑 울며 전화하고 있었다. “얼마나 끔찍한 걸 봤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야!”라며.

흥미로운 건 벨기에에서 이 작품이 기립박수를 받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이다. 페스티벌 관계자는 “바다와 접해 무역이 발달한 벨기에는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에 호의적인 반면에 클래식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는 지나치게 실험적인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현장법사 역의 배우 한 명이 바닥에 깐 대형 종이 위에서 잠자고, 사과를 먹으며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긴 여정을 그린 연극 ‘당나라의 승려’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도 고행길에 오른 듯 인내를 요구한 이 작품 역시 벨기에에서는 뜨거운 환호를 받았지만 빈에서는 관객의 절반 이상이 중간에 나가버렸다.

빈 관객이 기립박수를 거듭 보내는 광경을 본 건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 ‘노르마’가 끝난 뒤였다. 슈트와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인터미션 때 샴페인 잔을 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빈 사람들은 오페라를 이렇게 즐기는구나!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각 나라의 문화를 깊이 들여다보려는 욕구도 커지고 있다. 공연 관람은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지인이 공연장을 찾는 모습과 작품에 대한 반응을 통해 그 나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리세우 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아이다’의 관객 대부분은 백발의 어르신이었다. 모자를 쓰고 재킷을 입은 할머니, 정장 차림에 지팡이를 든 할아버지 등 멋을 낸 스페인 어르신들을 한 번에 그렇게 많이 보긴 처음이었다. 젊은층이 주요 관객인 한국과 달리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관객이 고령화되고 있다는 해외 연출가의 말에 당시 풍경이 떠올랐다.

이런 점에서 150개가 넘는 소극장이 밀집된 서울 대학로는 한국 문화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달 2일 시작해 이달 27일까지 열리는 ‘웰컴대학로’ 페스티벌은 외국인이 뮤지컬, 연극을 즐길 수 있도록 영어 중국어 일본어 자막을 제공하고 야외 퍼포먼스 등을 하는 행사다. 이 축제가 상설화돼 자막 서비스를 하는 공연이 늘어나고 탄탄한 작품을 꾸준히 알린다면 대학로는 외국인의 필수 방문지가 될 수 있다. 공연을 통해 맛보는 세계는 한층 깊고 더 강렬하기에.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공연#문화#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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