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참모본부에 대한 국회 국방위원회의 국정감사가 열린 8일. 기자는 박한기 합참의장의 답변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박 의장이 지난해 5월 북한이 폭파한 풍계리 핵실험장을 두고 “다시 살릴 수 있는 갱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핵실험장 폭파 직후 청와대는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첫 조치”라며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7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실험이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고 했다. 남북 모두 ‘완전한 폐기’라며 한목소리를 낸 핵실험장을 두고 군 서열 1위 합참의장이 뒤늦게나마 정면으로 배치되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대북 유화책이 정부 정책 기조인 만큼 북한 주장을 반박하는 핵실험장 복구 가능성 언급은 군내에서 사실상 금기시돼 왔다.
군 관계자들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A 씨는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이 갑자기 ‘북한에 핵실험할 갱도가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박 의장이 순간 당황해 있는 그대로 말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한미 정보당국은 정보 분석을 통해 풍계리 갱도 4개 중 3, 4번 갱도는 입구 위주로 폭파됐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돌이킬 수 없는 폐기라는 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며 “북한 의지에 따라 복구할 수 있는 문제로 박 의장은 사실관계를 말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박 의장은 ‘팩트’를 말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 발언이 낯설고 파격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지는 건 왜일까. 이는 군 당국이 그간 대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일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축소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본보는 3월 말 함경남도 신흥 일대에서 기습 타격에 유리한 고체연료 미사일 관련 활동이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신호가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도발 재개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 보도에 군 관계자들은 “도발 관련 징후는 없으며 일상적인 활동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약 한 달 뒤 북한은 ‘북한판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을 시작으로 고체연료 신형 발사체를 잇달아 발사했다.
이 외에도 군 당국은 북한의 특이 동향을 두고 “대수롭지 않다”는 식의 대응을 여러 차례 해왔다. 북한이 5월 처음 시험 발사한 북한판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을 탄도미사일이라 하지 못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급기야 지난달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북한의 단거리미사일 발사가 적대행위인가를 묻는 질문에 “우리가 (미사일을) 시험 개발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군 당국도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복귀시키려는 정부 기조를 큰 틀에서 따라가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발언과 대응을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상 군만은 대북 유화 기조 등 정치적 고려에 기반한 정무적 판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한 예비역 대장은 “군은 통일부 2중대가 아니다”라며 “통일부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할 때 군은 ‘반밖에 없다’고 보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군은 대북 군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되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적극 알려 국민을 안심시키면 된다”며 “있는 상황을 축소하거나 낙관적으로 해석해 알리는 건 군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 의장이 핵실험장의 진실을 말한 것은 군의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군의 자성과 위기감이 핵실험장 복구 가능성을 가감 없이 밝히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 이 발언이 군의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가 아니라 일회성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정부 기조에 맞춰 핵실험장에 대해 다시 함구하게 될 것이란 지적이다.
관심은 박 의장을 비롯한 군 최고위 당국자들이 ‘있는 그대로의 발언’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여부다. 군 수뇌부는 “대북 정보 사안이라 답변이 제한된다”거나 “핵실험장은 폐기된 것으로 안다”는 등의 기존 답변으로 되돌아가게 될까. 국회 국방위원회의 국방부 및 합참 등을 대상으로 한 종합감사가 21일 열리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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