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R등급인 ‘조커’ 한국선 15세… ‘조커’ 살해장면 잔인-분위기 우울
관객 “아이와 못보겠다” 지적에도 영등위 “만화 캐릭터 묘사 수준”
美 “모방범죄 위험… 청소년 제한”
명시적 기준 없고 주관 개입돼… 性-폭력에 관대해지는 추세
한국영화 ‘독전’ ‘마녀’ 등도 관객 인식과 등급간 괴리 논란
방송사 자체 드라마심의 더 허술… 재방송까지 마쳐서야 사후 규제
“아이랑 절대 같이 보지 마세요.”
2일 개봉한 영화 ‘조커’를 본 한 관객의 평이다. 미국 DC코믹스의 대표 악당, 조커의 기원을 다룬 이 영화는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로부터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15세 미만이라도 보호자를 동반하면 누구든 ‘조커’를 볼 수 있다. 123분 내내 ‘조커’는 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괴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잔혹한 살해 장면과 극 전체에 흐르는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관객들 사이에선 “상영 등급이 너무 낮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유독 많았다. 영화는 15일 기준, 관객 수 400만 명을 목전에 뒀다.
국내에서 벌어진 등급 논란을 넘어, 미국에서 ‘조커’는 실체적 위험이 존재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찰은 극장가 순찰과 경계근무를 강화했고 AMC, 랜드마크시어터 등 대형극장에선 ‘조커’ 상영 기간 중 관객의 가면 착용을 금지했다. ‘영화 한 편에 왜 이렇게 민감할까’ 의문이 들다가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년)가 상영된 콜로라도주의 한 극장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임스 홈스는 범행 당시 “나는 조커다!”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악인 관점의 영화가 모방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에 미국영화협회(MPAA)는 ‘조커’에 R등급(청소년 관람불가·부모 동반 시 가능)을 내렸다. MPAA는 “피가 동반된 강한 폭력, 충격적인 행동”이라는 등급판정 사유를 덧붙였다. 물론 ‘욕설(f-word)’이 두 번 이상 쓰이면 R등급을 내릴 정도로 언어 사용에 엄격한 미국의 잣대를 국내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다. 하지만 국내에서조차 “미성숙한 청소년에게 정서적으로 유해할 수 있다” “총기 소유가 불법이라 다행” 등 반응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조커’가 주는 공포는 결코 스크린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 ‘다소 높음’과 ‘높음’ 사이 모호함
‘조커’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된 살생 장면은 총 3번. 지하철에서 시비를 거는 금융회사 직원들과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은 아서 플렉에게 총으로 살해된다. 특히 가위로 전 직장동료 랜들(글렌 플레슐러)의 눈과 목을 찔러 피가 솟구치고 벽에 무차별적으로 머리를 부딪치게 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성인조차 “고개를 돌렸다”는 이들이 많았다. 총격 장면도 발포 소리를 키우고 피를 사방으로 분사시켜 공포가 극대화됐다.
영등위 입장은 어떨까. 영등위는 “가위나 총을 이용한 살상과 유혈을 묘사한 폭력적인 장면들이 등장하나 지속적이지 않아 폭력성과 공포의 수위가 다소 높은 정도”라고 했다. 또 “사회적 부조리함에 의해 폭력이 발생한다는 서사적 구조는 조커가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방위험 요소도 있지만 판타지 만화 및 영화에서 알려진 캐릭터를 묘사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영등위는 전문위원들(12명)의 1차 심사와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8명)의 토론을 거쳐 출석 위원 과반 이상의 찬성으로 등급을 의결한다. 주제, 선정성, 폭력성, 대사, 공포, 약물, 모방위험 등 7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낮음, 보통, 다소 높음, 높음, 매우 높음 등 5가지 단계로 상영등급이 매겨진다. 한 가지 항목이 ‘높음’으로 판단되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부여하는 식이다. ‘조커’는 선정성(보통)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다소 높음’ 평가를 받았다.
‘청소년 관람불가’와 ‘15세 관람가’를 가르는 ‘다소 높음’과 ‘높음’의 경계는 영등위 설명에 따르면 지속성과 구체성 여부다. 아서 플렉의 살생 장면은 영등위 홈페이지에 게재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분류 중 폭력성 항목에 담긴 ‘상해, 유혈 등이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묘사된 것’이라는 기준을 대입 가능할 정도로 구체성은 충족하지만,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 폭력과 공포 수위에 있어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평가 역시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그럼에도 극장에서 관객들이 체감하는 실질적인 공포, 폭력 수위가 영등위 인식과 상이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명시적인 기준이 없고 주관이 개입되다 보니 다른 영화와의 형평성 논란도 벌어지곤 한다. 지난달 25일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개가 남자의 팔과 성기를 물어뜯는 장면 등 잔혹한 장면이 극 후반부 10분 가까이 등장해 폭력성과 공포 항목에서 ‘높음’ 판정을 받았다. 영등위 홈페이지에서 관객들이 등급을 정하는 ‘나의 영화 등급’ 코너에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돼 있다. 이에 대해 영등위는 “지속성, 구체성의 수치적인 기준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 판단하고 있다”는 답변만을 전할 뿐이다.
○ 관대해져 가는 성·폭력 수위
관객들의 인식과 상영 등급 간 괴리는 지난해 2월 영등위 7기가 출범한 뒤로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6월 개봉한 ‘마녀’는 피 칠갑을 한 고교생이 사람들을 연달아 살해하는 장면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주제”라는 이유로 ‘15세 관람가’를 받았다. 당시 연출을 맡은 박훈정 감독도 “이 등급을 받을 줄 몰랐다”고 언급했을 정도. 미국에서 R등급을 받은 ‘더 보이’(올해 5월 개봉)도 눈에 유리가 박히고 턱이 부서지는 고어물의 요소가 다분하지만 “해당 연령층 이상이 습득한 지식과 경험으로 수용 가능하다”는 판단과 함께 ‘15세 관람가’가 내려졌다.
여성의 상체 노출이 포함된 영화가 대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는 영화계의 관행(?)도 지난해 5월 개봉한 ‘독전’에서 깨졌다. 모든 항목에서 ‘다소 높음’ 판정을 받은 이 영화는 마약 제조 및 흡입 묘사를 차치하더라도 배우 진서연의 상체가 2초가량 등장해 “흥행을 위해 제작사와 영등위 간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마저 퍼졌다.
물론 “영상표현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과 이해도 사회적 흐름에 따라 확대되고 있어 다양한 변화를 합리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영등위의 설명처럼, 성·폭력 묘사에 관대해지는 경향은 옳고 그름으로 섣불리 재단할 수 없는 문제다. 다수의 영화평론가들도 “예술의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한 평론가는 “영화감독이 위원장이라 표현의 자유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덕분에 제작사들은 영화의 수위에 관계없이 심의 전 적정 등급을 ‘15세 관람가’로 제출한 뒤 해당 장면들이 ‘덜’ 성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혈안이 된다. 한 영화 제작사 관계자는 “상영등급에 따라 관객 수입이 두 배 가까이 차이날 수밖에 없어 민감한 문제”라고 설명한다.
결국 애꿎은 피해는 극장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관객들 몫이다. ‘청소년 관람불가’와 ‘15세 관람가’ 사이 새 등급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7가지 평가 항목의 총합으로 등급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상영 등급을 믿고 극장을 찾은 시민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한 전직 영등위 위원은 “청소년을 대변하는 위원 참여 등 구성원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미국처럼 등급 심의를 민간에 맡기고 영화 관련 사이트에 ‘보호자 가이드’ 항목을 둬 문제가 될 만한 장면들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방식도 고려해봄 직하다.
○ 모자이크 처리하면 15세?
방송사 자체적으로 등급을 결정하는 드라마 심의는 더욱 허술하다. 보통 20명 내외로 구성된 자체 심의팀이 방영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방송프로그램 등급제 규칙’에 따라 주제, 폭력성, 언어사용, 모방위험 등을 고려해 등급을 매긴다. 방심위의 사후 규제가 본방송은 물론이고 재방송까지 방영된 뒤에야 이뤄지는 만큼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OCN ‘타인은 지옥이다’는 이를 뽑거나 칼로 신체를 찌르고, 인육을 연상케 하는 고기를 먹는 장면에도 6일 최종회(10회)에서만 ‘청소년 관람불가’로 방송됐다. 지난해와 올 초 ‘리턴’, ‘황후의 품격’으로 선정성 논란을 겪은 SBS도 ‘15세 관람가’인 ‘배가본드’에 성 접대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한 채 방영해 시청자들의 빈축을 샀다. 이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온 “마음 놓고 아이들이랑 TV를 볼 수 있겠냐”는 시청자의 지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수위에 관대해지는 영화, ‘영화적 퀄리티’에 목을 매는 드라마가 제작되는 요즘, 보편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심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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