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당권 도전에 나선 김영삼(YS)을 비밀리에 만나 불출마를 종용했다. 두 사람은 같은 김녕 김씨 집안이었고, 만남도 종친 어른이 주선했다. 김재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있지만 당신이 불행하게 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YS는 “나를 걱정해서 하는 걸로 들렸지만 굴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재규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YS가 (전당대회에서) 질 텐데 뭐 하러 만났나”라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YS를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을 했고, 차지철의 전횡에 격분한 김재규는 은밀히 YS를 지원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예상을 깬 YS의 총재 당선으로 정국은 요동쳤다.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 근로자 사망과 YS 의원직 제명으로 YS의 정치적 기반인 PK(부산경남)에선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해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가 마산 등으로 번지자 계엄령이 선포됐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고 김재규를 몰아붙이면서 정권 내부 갈등은 증폭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지 열흘 만에 발생한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렸다.
▷당시 부산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는 저녁에 퇴근한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판이 커졌다. 상인들은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주거나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을 말리기도 했다. 대다수 시위대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지만 ‘부가가치세 철폐’ 구호도 등장했다. 안정적인 세원 확보를 명분으로 1977년 시행된 부가가치세에 대해 누적된 서민들의 불만도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은 부가가치세를 박정희 정권 몰락의 한 원인으로 보고 이를 폐지하는 방안도 검토했다는 후문이다. 18년 장기 집권의 염증이 컸지만 경제 실정도 부마민주항쟁의 한 원인이었던 셈이다.
▷부마민주항쟁 시작일인 10월 16일이 지난달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자유민주주의 쟁취 역사의 한 페이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기념식에 참석해 “항쟁의 주역들과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조국 사태로 문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PK 민심이 심상치 않은 점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40년 세월의 간극이 있어 단순 비교할 순 없지만 부마민주항쟁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함께 ‘집권세력은 민심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국정운영의 철칙도 되새겨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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