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은 유명인에겐 치명적이지만 무명인에겐 명성의 사다리가 되기도 한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스캔들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인상주의의 주창자였지만 그 자신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고 국가의 공식 전람회인 살롱전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했다.
1667년 루이 14세 치하에서 탄생한 파리 살롱전은 예술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관문이었다. 전통과 규범에 충실한 아카데미 화풍을 장려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은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웠다. 1863년 살롱전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무려 5000점이 출품됐고, 2783점이 낙선했다. 낙선한 화가들이 심사에 불만을 제기하며 반발하자 나폴레옹 3세는 낙선작들을 모은 ‘낙선전’을 열었다. 불명예스러운 낙선전에는 마네의 작품 세 점도 포함됐는데, 그중 하나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다.
그림은 잘 차려입은 두 남성과 누드의 여성이 공원에 앉아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 남자들은 마네의 동생과 친구고 여성은 당시 18세의 빅토린 뫼랑으로 마네가 아끼던 모델이었다.
그림을 본 관객들은 경악했다. 우아한 비너스가 아닌 벌거벗은 매춘부가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두 신사 사이에 뻔뻔하게 앉아있다며 분노했다. 어쩌면 관객들은 당당하고 도전적인 그녀의 시선을 더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2년 뒤 마네가 같은 모델을 그린 누드화 ‘올랭피아’를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대중의 분노와 조롱은 최고조에 달했다. 두 그림 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 티치아노의 명화를 참조해 그렸지만 그런 유사성에 관심을 두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살롱전은 그에게 명예 대신 희대의 스캔들메이커라는 지위만 안겨줬다. 시대를 앞선 예술가의 운명이 그렇듯, 생전의 마네는 공개적 모욕과 가혹한 비난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사후엔 전통과 규범에서 회화를 해방시킨 혁명가이자 모더니즘의 여명을 연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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