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인천의 한 북한 음식점을 찾아 두부밥, 명태식해, 언감자떡 등 서민들이 즐겨 먹는 현지 음식들을 맛봤다. 주인도, 종업원도, 단골손님도 탈북자 출신인 허름한 이 식당의 대표 음식은 단연 ‘인조고기밥’이었다. 콩깻묵으로 만든 얇은 피에 밥을 싸서 먹는 것으로 생김새는 유부초밥과 비슷했다. 주인은 “‘고난의 행군’(1990년대 초중반 북한의 경제위기) 당시 북한 사람들을 먹여 살린 고마운 음식”이라며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국가의 배급이 끊어지고 먹을 것이 줄어들자 주민들은 마을을 떠돌던 개, 협동농장에서 키운 돼지와 닭, 오리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워야 할 가축을 총으로 통제했고 하층민들은 단백질을 섭취할 길이 끊겼다. 그래서 누군가 개발해 장마당에 내놓은 게 바로 인조고기다. 재간 있는 요리사들은 돈도 제법 벌었고, 몇 푼이라도 돈이 있는 자들은 인조고기를 먹고 경제위기를 건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경제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주민들이 어려웠던 시기를 추억하며 먹는 간식인 인조고기가 다시 ‘생존을 위한 눈물의 음식’이 될 우려가 나온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중국을 통해 전염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ASF는 이미 전국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돼지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ASF는 치사율이 100%여서 한때 북한의 장마당에 이 병으로 죽은 돼지고기가 식용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13일 “북한은 ASF로 인한 대재앙에 진입하고 있다”며 “단백질의 80% 이상을 돼지고기에서 얻는 주민들의 영양 공급원이 막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비단 주민 건강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소식통은 “돼지를 키워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이 한둘이 아닌데 ASF가 돌자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고 한다”며 “과거 한국 농민들이 소를 길러 자식들을 공부시켰는데 소들이 한꺼번에 병사했다고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 이런저런 경로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ASF로 우리도 비상이다. 휴전선 아래 민통선(민간인통제선) 안에서는 ASF 확산을 막기 위한 돼지 처치 작전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드론과 열감지기 등 최첨단 장비가 동원되고 민관군이 힘을 모은 70여 개 팀이 전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방역 당국은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공개하며 국민들의 협조를 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 당국의 자세는 ‘폐쇄적’ 그 자체다. 한 당국자는 “남북이 손잡고 공동 방역을 하자는 제의를 여러 차례 북한에 했지만 답이 없는 상태”라며 혀를 찼다. 국제기구에도 솔직하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있다. 올해 5월 30일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첫 발생 통보를 한 게 전부다.
북한 당국 자체가 정확한 실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고난의 행군 과정에 ‘자력갱생’이 몸에 익은 북한 주민과 협동농장, 심지어 군대까지 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 돼지를 키워 생존자금을 조달해 왔다. 당국엔 10마리라고 신고하고 실제로는 30마리를 키우는 식이다. 당국이 방역을 하고 싶어도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폐쇄성과 무능은 20여 년 전 북한 지도부가 소련의 체제 전환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수십만∼수백만 명의 주민이 굶어 죽도록 방치하게 된 핵심 원인이다. 22일 금강산에 올라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고 호기를 부린 김정은은 죽어가는 돼지로 주민들의 마음에 못이 박히는 현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폐쇄적이고 무능한 체제를 만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20년 전 굶주림에 죽어간 주민들의 비통한 삶을 한동안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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