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에게 혁신을 허락하라[동아 시론/문성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6일 03시 00분


아들 위한 혈당 측정기 응용 개발했다가
정부에 고발당한 엔지니어 엄마의 사례
혁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실히 보여줘
기업보다 나은 개인 혁신 사례 늘어나니
소비자 관점의 혁신과 규제 평가해야

문성욱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문성욱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지난해 언론에 소개돼 화제가 된 김미영 씨 사례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용자에 의한 혁신 활동을 저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에게는 소아 당뇨를 가진 아들이 있다. 혈당 측정을 위해 매번 채혈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여간 싫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해외에 피를 뽑지 않고 혈당을 측정하는 기기가 있음을 알았다. 관련 업체가 채산성 문제로 수입을 거부하자 혈당 측정기를 해외에서 직접 구매했다. 또 수시로 아들의 상태를 측정하고자 혈당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기기를 직접 개발해 혈당 측정기에 달았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엔지니어인 그가 아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처지의 부모들을 위해 해외 기기 구매와 데이터 전송기 만드는 법을 인터넷에 공유했다.

이에 대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허가를 받지 않고 기기를 수입하고 성능을 개조했다는 이유로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여론이 분개하자 식약처는 대체 치료 수단이 없는 의료기기에 한해 개인이 허가를 받고 수입,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그러나 김 씨가 의료기기 사용자로서 창출한 혁신(데이터 전송기)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와 대비되는 사례가 있다. 1998년 레고사는 RCX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동작하는 조립 블록 마인드스톰을 출시한다. 출시된 지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스탠퍼드대의 한 대학원생이 역공학으로 복원한 코드를 공개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엔지니어가 LegOS라는 오픈소스 언어를 개발하고 전파한다. 급기야 마인드스톰 사용자 경진대회에서 비공식 프로그램인 LegOS를 사용한 참가자가 공식 언어를 사용한 참가자들을 월등한 성적으로 제치고 1등을 차지한다.

레고사는 처음에는 법률 소송을 검토하지만 결국 이러한 ‘해킹’이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행위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나아가 사용자들의 역량을 흡수하기 위해 후속 마인드스톰부터는 오픈 플랫폼 방식으로 개발하기로 한다. 다양한 사용자 그룹이 앞다퉈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했고 ‘마인드스톰 생태계’는 더욱 발전한다. 마인드스톰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뛰어넘어 로봇공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육 도구가 됐다.

두 사례는 혁신의 창출과 확산 차원에서 유사점이 있다. 나아가 제품 및 서비스 공급자와 사용자 중 누가 혁신에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공급자가 정한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사용자가 혁신을 제안한다면 사회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우리에게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두 사례 모두 사용자가 혁신을 촉발했다. 공급자가 출시한 제품은 표준화, 규격화돼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많다.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내용과 수준이 다양해 공급자가 전부 인식하기 어렵고, 해결에 필요한 정보도 공급자가 아닌 사용자가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 사용자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해결책을 공유하려는 경향도 강하다.

과거에는 공급자가 기술을 독점했고 당국도 공급자 개발 역량 보호 및 향상에 초점을 뒀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교육 수준 향상으로 사용자의 기술 역량이 급속히 커져 왔고,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맞는 혁신을 직접 창출하고 공유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영국의 연구재단 네스타(NESTA)에 따르면 영국 사용자의 8∼15%가 소프트웨어나 제품을 자기 필요에 맞게 혁신하며, 혁신 성과를 공급자보다 더 활발하게 공유한다고 한다. 이는 제품 개발이나 디자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것으로 연구는 예측한다. 사용자가 제품 및 서비스 혁신을 창출하고 확산하는 소위 ‘회색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회색지대에서 공급자와 사용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공급자나 당국이 사용자 혁신을 쉽게 봉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색지대에서 활발해지는 혁신을 대하는 공급자와 당국의 태도가 매우 중요해진다.

혁신이 성장과 삶의 질을 제고하는 원천이 되려면 사용자가 창출한 혁신이 불필요한 고통 없이 수용되고 전파돼야 한다. 공급자와 사용자들의 기술 역량 격차가 점점 좁아지는 지금 공급자가 규정한 범위를 넘는 사용자 혁신에 기업은 합리적이고 전향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소비자 및 사용자 관점에서 혁신과 규제를 평가하는 것이 필수다. 사용자들에게 혁신을 허락하라!
 
문성욱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기술#혁신#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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