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5시. 청와대 앞에서 벌어진 정부 규탄 시위대의 구호가 마이크를 타고 녹지원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출입기자단 초청행사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의 표정은 모처럼 밝았다. 테이블을 오가며 맥주로 건배를 나눈 문 대통령은 윤도한 대통령국민소통수석을 가리키며 “내가 이렇게 많이 마신 거 처음 보셨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산행 이후 1년 만에 열린 문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단 초청행사는 청와대의 새로운 국정기조에 따른 것이다. ‘조국 사태’ 이후 청와대는 내부 토론을 거쳐 ‘민간 활력 제고를 통한 경제 활성화’와 ‘공정사회를 위한 개혁’, 그리고 ‘정성을 다한 소통’을 집권 후반기 국정기조로 세웠다고 한다. 2주간 4차례의 경제 일정과 법무부 차관 면담 등 3건의 공정 개혁 관련 일정을 몰아친 문 대통령은 출입기자단 초청행사로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는 소통 앞에 ‘정성을 다한’이라는 표현을 더하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감도 담았다.
소통 행보를 재개한 문 대통령은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국정이 참 어렵다”고 했다. 대입 정시 비중 확대를 두고 진보 진영 일부는 물론 정시 확대에 찬성해 온 야당들마저 “입시제도는 대통령 지지율 올리겠다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게임이 아니다”고 비판하고 나선 데 대한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정이 참 어렵다”는 대통령의 심경 토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북-미 비핵화 합의가 지연된 가운데 남북관계 속도조절론이 불거졌을 때도, 최저임금 인상의 거센 후폭풍으로 소득주도성장 논란이 거셌을 때도 “무엇 하나 어렵지 않은 과제가 없다”는 고백이 뒤따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렵다”는 문 대통령의 심경 토로는 주로 정치권을 향해 있다. 5월 2일 협치(協治)와 통합을 강조하는 사회 원로들의 당부에 “과거 어느 정부보다는 야당 대표들, 원내대표들 자주 만났다고 생각한다”며 “정치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하고 있다”고 했다. 9월 1일 동남아시아 3국 순방길에 오른 문 대통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에 “좋은 사람을 발탁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국무회의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때는 “입법이 어려울 경우에 대비해 정부 자체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문이 잇따른다. 인사와 협치, 경제 등 얽히고설킨 국정의 실타래가 야당의 발목잡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정치권에 대한 문 대통령의 불만은 22일 국회 시정연설에 앞서 국회의장단, 여야 대표들과 가진 사전환담에서도 드러났다. 문 대통령은 “평소 야당에서 나오는 목소리 좀 많이 귀담아들어 달라”는 이주영 국회 부의장의 발언에 “워낙 전천후로 비난하셔서”라는 날이 뾰족이 선 농담으로 맞받아친 것은 어느 때보다 멀어진 청와대와 여의도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청와대 안팎에선 문 대통령의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뿌리를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의 경험에서 찾기도 한다.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를 거치며 야당은 물론 당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경험이 대통령에게 정치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며 “취임 후 야당 대표와의 일대일 소통도 여러 차례 추진됐지만 벽을 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시정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저 자신부터,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과 함께 스스로를 성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안을 두고 청와대와 여야의 전운(戰雲)이 점차 짙어지는 가운데 청와대와 국회의 허심탄회한 소통을 당분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국회를 멀리하는 반쪽 소통으론 집권 후반기에도 ‘어려운 국정’을 정상화시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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