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골프계의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한 명의 선수에게 집중됐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4·미국)였다. 우즈는 이날 일본에서 끝난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조조 챔피언십에서 통산 82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샘 스니드(작고)의 역대 최다승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앞서 경기를 끝낸 20대 초반의 한 선수는 발톱을 감춘 채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최종 4라운드에서 5타를 줄이며 선두권으로 도약한 임성재(21·CJ대한통운)였다. 지난 시즌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PGA투어 신인왕에 뽑힌 임성재는 올 시즌에도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샌더슨 팜스 챔피언십에서 단독 2위를 차지했고, 이번 대회에서는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와 함께 공동 3위에 자리했다. 2019∼2020시즌 들어 벌써 5개 대회에서 두 번째 ‘톱5’다.
임성재는 13일 끝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코리안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 제네시스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7타 차 열세를 딛고 대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자신의 생애 첫 1부 투어 우승이었다. 이번 시즌에 생애 첫 PGA투어 우승 트로피를 꿈꾸는 임성재를 지난주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만났다.
○ 많은 대회 나가는 게 오히려 즐거운 철인
―지난 시즌 35개 대회에 출전하며 ‘아이언맨(Iron man·철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 시즌에도 비슷한 수의 대회에 나간다고 밝혔다.
“대회에 나가는 거 자체가 너무 좋다. PGA투어라는 곳은 모든 골퍼에게 꿈의 무대 아닌가. 한 대회라도 안 나가면 너무 아깝다. 나갈 때마다 잘 치고, 그러면 그에 맞는 상금도 받고 하니까 재미있다.”
―PGA투어를 뛰어 보니 어떤 점이 그리 좋은가.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대회가 열리는 지역 공항에 내리면 주최 측에서 일주일 내내 쓸 수 있는 차를 빌려준다. 평소에 타기 힘든 고급 차들이다(웃음). 호텔에 가면 빨래도 다 해 준다. 무엇보다 어릴 때 TV로만 보던 선수들과 함께 경기하는 거 자체가 기분 좋다.”
―많은 경기를 뛰면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한데….
“아직 어려서인지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다. 따로 트레이닝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스트레칭 같은 걸 좀 많이 하려고 한다. 올겨울부터는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한 시즌을 버틸 체력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 신인상을 받았다.
“내심 ‘못 받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했다. 페덱스컵 포인트 상위 30명만 출전할 수 있는 플레이오프 최종전인 투어 챔피언십에 신인으로는 유일하게 나갔지만 우승을 한 번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CJ컵이 열리기 직전에 제이 모너핸 커미셔너가 직접 전화해 수상 소식을 알려주셨다. 아시아 최초,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이라 더 큰 의미가 있다. 자부심을 안고 투어를 뛸 수 있을 것 같다.”
―신인왕이 된 뒤 달라진 게 있나.
“한국에서는 많이 뛰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다 보니 이전에는 한국 팬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국내 연습장에 갔는데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시더라. 이제는 어느 골프장을 가도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함께 찍자는 분들이 많아졌다.”
○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
―미국에 따로 집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집이 있으면 좋긴 하다. 그런데 워낙 많은 대회를 다니다 보니 사실 집에 갈 일이 없기도 하다. 호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부모님과 함께 대회가 열리는 도시의 호텔을 돌아다닌다. 매주 다른 곳으로 여행하는 기분이다. 아직까진 재미있게 투어를 다니고 있다.”
―프로 데뷔 후 일본과 PGA 2부 투어를 거쳐 PGA 신인왕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만큼 결정적인 순간 좋은 샷이 나온다. 경기를 하다 보면 ‘이 샷은 꼭 들어가야 해’라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2차전인 BMW챔피언십 4라운드 7번홀(파5)에서 나온 이글이 대표적이다. 3차전 진출을 위해서는 뭔가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당시엔 너무 긴장해 침이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홀에서 친 로브 샷(높이 띄워 치는 어프로치 샷)이 거짓말처럼 이글로 연결되더라. 그런 걸 보면 운이 많이 따르는 것 같다.”
―매 시즌 홀인원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3월에 열린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2라운드 13번홀에서 미국에 온 뒤 첫 홀인원을 했다. 대회에서는 컷 탈락했지만 뭔가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이후 모든 대회가 잘 풀렸다. 이번 시즌에는 첫 대회인 밀리터리 트리뷰트 첫날 홀인원을 했다. 새 시즌 PGA투어에서 나온 전체 1호 홀인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다. 이번 시즌에도 뭔가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목표 이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2부 투어에 처음 갔을 때 당연히 목표는 PGA투어 시드를 따는 거였다. 그런데 지난해 1월 첫 대회인 바하마 클래식에서 덜컥 우승했다. 다음 대회에선 준우승을 했다. 불과 2개 대회 만에 PGA투어 시드를 딴 것이다. 지난 시즌 PGA투어에 올라왔을 때 목표는 시드를 지키는 거였다. 그런데 내 목표를 넘어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위기 때나 뭔가 간절히 필요할 때 더 집중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새 시즌의 목표가 궁금하다. 2019∼2020시즌에는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시즌에는 페덱스컵 포인트 상위 30명만 출전하는 투어 챔피언십 진출이 최종 목표였다. 꿈을 이뤄 너무 행복했다. 그 대회에는 타이거 우즈만 없었다(우즈는 42위로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올해 다시 한 번 30명 안에 들어가고 싶다. 이번 시즌에는 못 했던 우승까지 한 번 해서 투어 챔피언십에 오르면 좋겠다. 내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도 따고 싶고, 메이저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드라이버와 롱 아이언이다. 드라이버는 내가 생각한 위치로 정확하게 보낼 자신이 있다. 오히려 3번 우드를 치는 것보다 편하다. 아이언은 탄도가 높은 편이라 딱딱한 그린에서도 공이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 요즘은 쇼트 게임 연습을 많이 한다. 100야드 안쪽의 웨지 샷을 잘 쳐야 버디 기회를 많이 만들 수 있다.”
○ 운명처럼 처음 잡은 골프 클럽
―골프 선수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모두 골프를 치셨다. 아주 어렸을 때인데 엄마를 따라 실내 연습장에 가서 공을 친 기억이 있다. 누가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재미있게 공을 쳤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버지가 골프를 시키셨다. 예닐곱 살 정도부터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것 같다.”
아버지 임지택 씨(54)는 “성재가 아기였을 때 내가 한창 골프에 재미를 들였다. 어느 날 거실에 골프 클럽을 놔 뒀는데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성재가 그 클럽으로 마루를 막 때리고 있더라. 그날 곧바로 근처 마트에 가서 장난감 골프채를 사 줬다. 골프채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잘 놀았다. 여섯 살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켰다”고 설명했다.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게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라는 말도 있다.
“덩치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든 음식을 잘 먹는다. 원래부터 햄버거나 피자 같은 걸 좋아했다. 콜라 같은 탄산음료도 따로 가리지 않는다. 미국에서 먹는 수제 햄버거는 꽤 맛이 좋다. 아침, 점심은 주로 골프장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숙소 인근 한국 식당에 가서 먹는 편이다. 또 후원사인 CJ에서 햇반을 비롯한 각종 음식물을 보내주신다. 한국 식당이 없는 곳에서는 많은 도움이 된다. 항상 감사드린다.”
임성재는 이번 시즌에도 아버지 임 씨, 어머니 김미 씨(52)와 함께 긴 여행(투어)을 한다. 임 씨는 “앞으로 당분간은 아들을 따라 투어 생활을 할 생각이다. 4, 5년쯤 뒤 배우자를 만나면 그때 우리 부부는 빠질 생각”이라며 웃었다. 필드를 호령하는 임성재에게 가족은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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