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역사적 현장에 몰리는 독일인들
급격한 통일로 동-서독 정서 괴리, 극우세력 재부상 우려 속 통일 추진
그는 회색빛 벽을 본 뒤 잠시 눈을 감았다. 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보였다. 3.6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은 군데군데 뜯겨져 나가 생선가시 같은 철골구조물이 드러났다. 벽 반대편이 훤히 보이는 곳도 많았다. 다음 달 9일이면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된다. 기자는 18일 독일 통일 당시 동독의 마지막 인민의회(국회)에서 사회민주당(SPD) 원내총무로 활동한 리하르트 슈뢰더 훔볼트대 명예교수(76)와 함께 베를린 장벽을 찾았다. 그는 독일 통일조약 협상에 동독 측 대표로 참석해 독일 통일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콘크리트에 담긴 장벽 붕괴 30년의 기억들
30년 전 베를린을 동서로 가른 베를린 장벽의 길이는 총 160km에 달했다. 현재는 그 일부만이 남아 당시 베를린 시민들이 겪은 회한, 분노, 기쁨 같은 역사적 순간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벽을 보던 슈뢰더 교수는 “동서로 나뉘었던 베를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운을 뗀 뒤 당시의 기억을 그림 그리듯 설명했다.
“1989년 11월 9일 오후 11시경이었을 겁니다. 거실에서 글을 쓰다가 TV를 켰는데 여행 자유화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바로 현장에 가려 했죠. 그런데 가족들이 못 가게 만류했어요. 장벽이 다시 막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고 걱정한 거죠. 뜬눈으로 꼬박 밤을 새운 후 아이들을 데리고 붕괴된 장벽을 넘어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장벽 앞에는 웅덩이가 파인 흔적이 있었다. 1961년 동독 공산당은 급히 장벽을 만들고, 벽 앞에 구덩이를 파서 차가 돌진하더라도 벽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했다. 장벽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졌다. 슈뢰더 교수는 “너무 빠른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30년 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시민들의 개혁요구가 계속되자 ‘민심 달래기’용으로 서베를린에 갈 수 있는 ‘여행 자유화’ 조치를 준비했다. 원래는 비자를 신청한 뒤 허가를 받도록 한 제한적 조치였다. 그러나 동베를린 공산당 귄터 샤보브스키 대변인이 이날 저녁 기자간담회에서 “언제부터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바로 지금부터”라고 잘못 발표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제한 조치임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말했던 것이 변화를 촉발시킨 것이다.
이 장면을 TV로 지켜본 동베를린 주민들은 곧바로 장벽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28년간 장벽을 넘으려다 총에 맞은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두 명 용기를 내 장벽에 다가서는 과정에서 경비병이 총을 쏘지 않자 환호가 터졌다. 폭이 50cm도 안 되는 벽 윗부분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장벽이 무너진 순간이다. “다음 날부터 매일 3000명씩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에 갔습니다. 거대한 행렬이 강물 같았죠. 사람들은 베를린 장벽을 망치나 돌, 심지어 맨손으로 뜯어냈습니다.”
이듬해 3월 동독 내 첫 자유선거로 이뤄진 인민회의가 소집됐고 10월에 통일이 이뤄졌다. 분단 45년 만이었다. 슈뢰더 교수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동독을 먼저 개혁하고, 동서독 교류를 확대하고, 마지막에 장벽을 없애야 더 좋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번에 장벽이 무너졌으니…. 장벽이 무너진 건 필연 같습니다. 단순히 독일이란 나라가 통일한 것을 넘어서 독재를 무너뜨리고 시민들이 지유와 인권을 회복한 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정책, 동구권 공산 국가들의 붕괴, 동독 경제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결국 자유를 원하는 동독인의 힘이 결정적이었다는 의미다.
○ 독일 청년 “부모 세대 일이지만 기쁜 축제”
19, 20일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을 비롯해 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화해의 교회’ 등 장벽 관련 전시 시설에는 관광객은 물론 많은 독일인들이 몰렸다. 장벽에 대한 기억을 자녀와 나누려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30주년 행사도 도심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장벽 기념시설에서는 30년 전 벽을 넘으려고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끌어올려준 모습을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도자기용 찰흙에 핸드프린팅을 한 뒤 벽에 매다는 식의 참여형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장벽이 사라진 장소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비추면 30년 전 장벽이 보이는 증강현실(AR) 애플리케이션 시연도 펼쳐졌다.
베를린 장벽을 경험하지 못한 독일 청년들에게 30주년은 축제처럼 여겨졌다. 이런 분위기는 화가 100여 명이 베를린을 관통하는 슈프레강을 따라 1.3km 남겨진 장벽에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서 두드러졌다.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입을 맞댄 모습을 그린 벽화 ‘형제의 키스’ 앞에서 만난 카티야 씨(19)는 “동독과 서독은 과거 이야기고 지금은 그냥 하나의 독일”이라고 말했다.
○ 정서적 통일은 여전히 멀다는 시민들
기자가 만난 베를린 시민 중 상당수는 “마음 속 장벽은 남아 있다”고 했다. 동독 출신이라고 밝힌 한스 씨(51)는 “동독이 흡수되는 식으로 통일이 되다 보니 동독 사람들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것 같다”며 “서독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거리감이 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독일 통일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동독 지역의 경제력은 서독 지역의 75% 수준(2018년 기준)에 그친다. 평균 임금도 서독의 84%다. 동독 지역 주민의 절반이 넘는 57%가 “난 독일의 2등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격차를 바라보는 시각은 갈린다. 서독 출신들은 “동독보다 못사는 서독 지역도 많다”며 “왜 동독만 챙겨야 하나”라고 항변한다. 독일 정부는 30년간 2조 유로(약 2597조 원)를 동독 지역 경제와 인프라에 투입했다. 소득의 5.5%에 달하는 ‘연대세’로 충당했다.
반면 동독 출신들은 “통일로 동서독 마르크화를 무리하게 통합하면서 동독 기업은 경쟁력을 잃게 돼 실업률이 급증했다” “성장 동력의 한계에 다다른 서독이 동독 시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경제 격차와 별개로 동독 경제력이 다른 동유럽 국가보다 앞서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다. 동독 지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서독 지역의 75% 정도지만 이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보다 훨씬 높다. 김상국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교수는 “경제나 인프라 등은 거의 90%까지 동독 지역이 서독 지역을 따라왔다”며 “통일 과정에서 동독이 존중 받지 못했다는 생각, 상대적 박탈감, 동독 지역 인구 감소로 정서적 장벽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 향후 30년은 마음의 통일 추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계기로 향후 30년은 정서적 통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독일 통일 29주년을 맞은 이달 3일 북부 항구도시 킬에서 열린 통일기념식에서 “통일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경제에너지부는 동독 지역 발전 상황 모니터링으로 동서 균형 발전을 조율하는 부서도 운영한다.
동서독 주민 간 정서적 괴리감 때문에 극우세력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달 27일 열린 옛 동독 지역 튀링겐주 지방선거에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집권여당 기독민주당(CDU)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AfD는 지난달 옛 동독 지역인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 선거에서도 각각 2위에 올랐다. 동독 출신자들의 소외감을 자양분 삼아 급성장했다는 평가다. 2012년부터 이민정책을 확대하면서 일자리를 이민자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낙후된 동독 지역 주민들이 늘어난 점이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부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전 충분한 준비에 대한 걱정이 교차했다. 그런 점에서 슈뢰더 교수의 말은 계속 여운을 남긴다. “장벽 붕괴 전에도 동서독 간엔 전화와 편지로 서로 연락하고 상호 방문도 많았다. 그런 동서독도 30년이 지나도록 정서적 격차가 남아 있다는 점을 한국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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