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부채[이준식의 한시 한 수]〈30〉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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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잘라낸 제(齊) 지방의 흰 비단, 눈서리처럼 희고 고왔지요. 마름질로 합환 문양 부채를 만드니 둥그러니 명월과 같았지요. 그대 품속이나 소매를 들락이면서 살랑살랑 미풍을 일으켰지요. 가을 닥쳐와 찬바람이 무더위를 앗아갈까 마냥 불안했는데 상자 속으로 부채가 버려지면서 임의 사랑도 그만 사그라졌지요. (新裂齊紈素, 鮮潔如霜雪. 裁爲合歡扇, 團團似明月. 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棄捐협사中, 恩情中道絶.)―‘원망의 노래(怨歌行·원가행)’(반첩여·班l여·기원전 48년∼서기 2년)
 
부채는 가을 찬바람과 함께 용도 폐기되는 게 필연이자 숙명이다. 제아무리 예뻐도 여름날처럼 매양 품속이나 소매에 감추어 둘 수는 없다. 합환(合歡)은 서로 대칭되는 문양을 말하는데 주로 부부간의 끈끈한 애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합환이 영원하리라 믿는 건 위험하다. 합환 부채라 해도 상자 속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그 신세는 고립무원이자 아득한 절망이 되고 만다.

그렇게 내쳐진 황제의 여인은 앙탈하고 반항하기는커녕 아린 속내를 안으로만 삭힌 채 영혼의 품위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시나브로 ‘가을 부채’가 떠올랐을 것이다. 실총(失寵)의 생채기를 달래는 것도 잠시뿐, 잊혀진 망각의 나날을 견뎌야 하는 긴긴 시간들이 그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총애 잃은 신하의 처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첩여 반 씨의 이 절절한 하소연은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멀어지자 화려했던 과거로 귀소하려는 사대부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첩여는 황제의 비빈(妃嬪) 중 하나. 황후보다 한두 등급 아래일 정도로 지위가 높았다. 반 씨는 재덕(才德)이 뛰어나 한 성제(成帝)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 총애가 조비연(趙飛燕) 자매에게로 옮겨가자 태황후의 시녀를 자임하며 제 발로 황제 곁을 떠났다. 이 시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원가행#반첩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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