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화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이렇게 말한다. 매주 이틀씩 양조장 일을 도와주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미래의 와인 메이커 청년이다. 올 때마다 빨간 장화를 신고 일하기 때문에 그를 보면 모두가 “그 빨간 장화 총각?” 하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빨간 장화가 됐다.
쌀밥에 가지와 소고기를 함께 볶아서 곁들인 점심상에 레돔이 얼마 전에 착즙한 레드와인을 한 병 가득 따라 왔다. 발효가 거의 끝났지만 아직 완성된 술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지난 술은 풋풋한 과일 향을 그대로 머금고 있어 보졸레 누보를 마시는 느낌이 든다.
“이번 술은 굉장히 잘 익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빨간 장화 청년이 말한다. 포도송이를 따서 발효탱크에 넣고 으깨는 일을 할 때 그가 도왔다. 혈기 넘치는 청년과 부드러운 중년의 두 남자가 함께 빚은 술이 어떤 맛으로 완성될지 궁금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술을 맛보는 것이 더 좋다. 아직 덜 익은 술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풋풋하게 충돌하는 여러 맛들은 프랑스 보졸레 누보가 부럽지 않다. 미숙한 술을 마시는 것은 양조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막걸리 도가에서 막 발효를 시작한, 터져 오르는 탄산 가득한 술을 마셔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술인데도 양조장을 떠나면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은 신기하다. 인간이 아닌 양조장을 관할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양조장은 원래 충주 도자기 마을 속에 있는 도자기 공방이었는데 월세를 얻어 들어왔다. 도자기를 굽는 동안 이곳에는 흙과 불을 관장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술을 빚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사과 껍질에 붙은 온갖 술 효모들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 레돔은 아침에 양조장에 들어설 때면 효모들이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문을 열고 ‘안녕?’ 하고 다정하게 인사말을 건넨다.
“그런데 포도나무 품종을 각기 다른 것으로 준비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빨간 장화가 이런 질문을 한다. 두 사람은 지난해 겨울에 삽목한 포도나무 뽑는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모두 일곱 품종의 포도나무들을 오십 그루씩 뽑아낼 예정이었다. 덜 익은 술을 마시면서 미래의 술이 될 나무 이야기를 하는 이 순간 두 남자는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다. 눈앞에 있는 나무와 땅, 내일의 날씨와 미래의 술 이야기만 끝없이 이어진다.
“한 고랑에 다른 품종들을 번갈아가며 심는 이유는 병충해가 생겨도 옆 나무로 쉽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그리고 열네 번째는 포도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들을 심을 거야. 가령 보리수나무 같은 것들. 이런 나무들은 대기 중의 질소를 당겨주는 것은 물론 해충들의 서식지가 되어 포도나무를 보호할 수 있지. 자, 그럼 이제 일하러 가볼까?”
그들은 서둘러 밭으로 간다. 남자 둘이 뿌리를 뽑는 동안 나는 나무 종류별로 리본을 맨다. 실바너는 초록색, 피노블랑은 흰색, 머루는 빨간색. 조그만 막대기였는데 이렇게 긴 뿌리를 내린 것이 신기하지만 언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릴까. 아득하다. 두 남자는 고고학자처럼 무릎을 꿇고 실뿌리 하나라도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파내고 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늦가을 빛은 참 짧기도 하다. 아직 뽑아야 할 것이 많은데 벌써 밤이슬이 등짝을 축축하게 적시고 손이 시리다. 이럴 때 누군가 따뜻한 차를 한잔 내오면 좋으련만.
이제 그만하자고 세 번을 소리치니 두 남자가 겨우 허리를 일으킨다. 둘 다 코를 훌쩍인다. 벗어두었던 잠바를 껴입으며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논의한다. 포도밭 고랑에 뿌릴 호밀과, 동네 분이 그저 가져가라고 한 열 마지기 논에서 걷어 와야 할 볏짚과, 포도나무 식재할 곳에 뚫어야 할 구멍과, 운반기 빌리러 가야 하는 일과, 대나무 지지대를 사야 할 일과, 경운기로 짚을 옮겨와 포도밭에 덮어야 할 일. 빨간 장화가 하늘을 가리키며 해맑게 웃는다.
“아, 저 달 좀 봐요. 너무 예쁜데요. 내일 날씨가 아주 좋겠어요!”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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