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때로 사건을 기록하면서 거기에 감정의 기록을 덧붙인다. 조선시대의 한문소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즉 강화도 꿈 이야기는 그러한 기록이다. 소설에는 열다섯 명의 여자 귀신들이 으스스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새끼줄에 목이 묶여 있기도 하고, 머리가 깨지거나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의 참혹한 모습을 저마다 간직하고 있다. 상처에 붙들린 트라우마의 전형적인 징후다.
소설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절개와 정절을 지키려고 자결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혼백들이 차례로 얘기를 하자 숲은 눈물바다가 된다. 네 번째 여성의 이야기가 특히 아프다. 왕비의 언니이며 중신의 아내였던 그녀는 아들이 건네준 칼로 죽었다.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죽음은 남성이 강요한 거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책임한 남성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싸우지 않고 도망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문을 열고 오랑캐를 맞아들인 사람도 있다. 자기들의 목숨은 보전하려고 하면서 여성들에게는 죽어서라도 절개와 정절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모순적이다.
스토리의 핵심은 끝부분에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성은 양반 집안 출신인 다른 여성들과 달리 기녀(妓女)로 살다 죽은 사람이다. 그녀는 다른 여성들이 통곡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나라가 무너졌음에도 절의를 지키는 충신들이 하나도 없을 때, 여성들은 자결까지 하면서 정절을 지켰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기녀의 말에서 위로를 받기는커녕 대성통곡을 한다. 왜 그럴까.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남성들에 의한, 남성들을 위한, 남성들의 사회에 위임한 자신들의 운명이 서러워서다.
누군가는 그들의 혼백이 말하는 서러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증언해야 했다. 강도몽유록의 작가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으스스한 귀신 이야기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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