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에 빠져 파면된 북한군 총참모장[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4일 03시 00분


2012년 4월 15일 김일성광장 열병식장에서 리영호 총참모장(왼쪽)이 김정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는 최룡해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 동아일보DB
2012년 4월 15일 김일성광장 열병식장에서 리영호 총참모장(왼쪽)이 김정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는 최룡해 당시 북한군 총정치국장.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리영호 북한군 총참모장은 김정은 집권 이후 숙청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7월 15일 북한은 당 정치국회의를 열고 “리영호를 신병 관계로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놀라운 소식이었다. 리영호는 김정은의 군사 과외선생이자 고문이었다. 그는 김정은이 군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북한군 차수로 승진했고, 실세 중의 실세가 됐다. 김정일 장례식 때 그는 김정은과 나란히 서서 운구차를 호위했다.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김정은 김영남 최영림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과 허수아비 총리인 최영림을 빼면 사실상 리영호가 김정은 다음의 실세임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수많은 억측이 쏟아졌지만 당시에는 정확한 이유와 생사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여러 소식통을 통해 리영호의 숙청 이유를 취재했다. 그 결과 리영호가 북한에서 ‘얼음’이라 불리는 필로폰 복용 및 제조, 판매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돼 몰락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2녀 1남 자식 중 둘째 딸이 화근이었다. 리영호는 강원도 근무 시절 눈여겨본 부하를 둘째 사위로 삼은 뒤 친아들 이상으로 챙겼다. 리영호 숙청 직전 친아들은 대대 정치지도원(대위)에 불과했지만 둘째 사위는 대좌(대령) 계급을 달고 많은 뇌물을 챙길 수 있는 핵심 보직을 꿰찼다. 또 평양 외곽을 방어하는 91훈련소(군단급) 부사령관으로 승진할 참이었다. 실세 장인을 등에 업은 사위는 상관인 군단장의 지시도 무시할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리영호의 둘째 딸은 허리가 늘 아팠는데, 그의 집에 어느 날 ‘유명 한의사’가 나타났다. 의료시스템이 붕괴된 북한에는 지방을 떠돌며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가 많다. 이들 중에는 간부나 부유한 가정의 여인들을 노리는 사기꾼들도 있다. 둘째 딸에게 접근한 한의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이고 필로폰을 이용해 치료를 시작했다. 통증을 잊게 된 둘째 딸은 그를 평양의 친정에 소개한다. 이후 리영호와 가족들은 물론 책임운전사까지 그에게 빠진다. 이들은 그가 필로폰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얼마 뒤 리영호는 총참모부 산하에 ‘화학무기연구소’를 만들었다. 필로폰을 제조해 팔겠다는 의도였다. 떠돌이 한의사는 총참모부 산하 화학무기연구소 소장이라는 고위 군관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벼락출세로 안하무인이 된 리영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뿌리 굵은 가문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 노동당 조직지도부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리영호는 민간 출신인 최룡해가 자신을 견제하는 자리인 총정치국장이 된 데 불만이 컸다. 이에 최룡해는 보위사령부에 리영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책임운전사가 연구소에서 만든 필로폰을 판매업자에게 넘기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장성택과 최룡해 등은 리영호를 ‘현대판 김창봉’으로 몰았다. 김창봉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김일성의 큰 신임을 받고 민족보위상(국방장관)까지 오른 인물로,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청와대 습격사건, 하루 뒤인 22일 벌어진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을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위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다 1969년 숙청됐다.

리영호는 해임 전 고급당학교에 적을 두고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의 아내가 남편의 죄를 속죄한다며 조사 기간 평양 창전거리살림집 건설 현장에 자원해 일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둘째 딸은 남편과 강제 이혼을 해야만 했다. 둘째 사위는 고위급 전용병원인 남산병원에서 마약치료를 받고 제대한 뒤 황해남도 용연군 인민군농장 관리부위원장으로 좌천됐다.

리영호는 일부 언론 보도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 3, 4년간의 혁명화 과정을 거친 뒤 총참모부 작전처로 복귀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의 파면을 주도한 최룡해가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형식적이지만 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복권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올해 77세인 리용호는 김정은의 신임을 다시 받아 지금 무대 뒤에서 군사고문으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군#리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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