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
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시에는 항상 여백이 있다. 여백의 많고 적음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시는 여백이 적은 대신 시인의 꽉 찬 감정을 충만하게 전해준다. 밥을 수북이 담은 배부른 시라고나 할까. 그리고 어떤 시는 여백이 많아서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든다. 직접 일어나서, 저 여백을 너의 이야기로 채우라. 여백이 많은 시는 이렇게 주문한다. 이를테면 강은교의 ‘가을’이 바로 이런 시에 해당한다. 시인은 세상의 윤곽만 그려놓고는, 많은 부분을 우리가 채우도록 한다. 시에서의 채움이 정신적 여행이라면 이 가을 여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기쁨과 슬픔이 사는 곳을, 우리는 바라본다. 아무래도 그림 같고, 어떻게든 눈이 부셔서 작은 오두막을 눈여겨본다. 우리 사는 곳처럼 메마르지 않았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기쁨을 만날 수 있으니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서성거렸다. 힐끔거렸다. 그랬더니 더 큰 산이 말했다. 너 자신의 집으로 어서 가라고.
이것이 여행의 스토리이고, 그 끝에 선 각자는 저마다의 상상에 빠진다. 기쁨과 슬픔이 사는 오두막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잡히지 않는 파랑새와도 같다. 혹은 현실이 싫어 찾은 도피처 같은 곳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전쟁 같은 현실로 돌아간다. 힘겹기에 사랑하고 사랑해서 힘겨운 집으로 돌아간다. 단, 이것은 내 여백의 이야기이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여백이 존재하는 법. 지금 이 시는 당신의 슬픔과 기쁨과 집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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