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형 비례제도가 그리 훌륭하면 독일만 달랑 채택했을 리 없다
청와대 비리의혹 잇달아 터지는데 사법부·검경 장악 위한 공수처 법안
의원 밥그릇 지키자고 거래할 텐가
결국 수순대로 가는 모습이다. 민주국가가 독재로 후퇴하는 공식은 ①위기 때 카리스마적 지도자처럼 등장해 ②계속 적(敵)을 만들면서 ③사법부와 언론, 군부를 제 편으로 만들어서는 ④영구집권을 위해 선거제를 바꾸는 것이라고 지난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소개했다.
우리의 집권세력은 ③번과 ④번을 패키지로 묶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우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으로 사법부와 검경을 확실히 장악하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으로 군소야당 특히 위성 정당 같은 정의당 의석을 늘려줌으로써 좌파 독재를 꾀하는 ‘야만의 트랙’ 또는 트릭이다.
자유한국당에선 “공수처를 주고 선거법을 막자”는 소리가 나온다. 공수처는 한국당이 집권하면 폐지할 수 있다는 정치 공학적 해법인 듯하다. 그들에겐 더 중요한 선거제가 개편돼 내년 총선에서 패배하면 돌이킬 방법도 없다는 논리다.
일리가 없진 않다. 독일식 연동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내각책임제 아닌 우리나라에서 독일처럼 협치와 연정(聯政)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렇게 좋은 제도라면 많은 나라가 도입하지 달랑 독일만 할 리도 없다. ‘초과 의석이 발생해 정치적 불안정성을 높이고 여소야대가 일상화돼 입법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민주연구원 이슈브리핑에서 지적됐을 정도다.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50% 연동률이어서 비례성이 높지도 않다. 심상정 같은 정의당 실세는 지역구에서 낙선해도 비례대표가 될 수 있게 석패율제까지 집어넣었다. 정당 민주화나 정치개혁과는 거꾸로 갈 판이다. 심상정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사법개혁의 상징’이라며 싸고돈 것은 선거법 개정 이후 닥칠 좌파연대 독재의 ‘미리 보기’였던 셈이다.
안 그래도 지금 집권세력은 공수처 설치가 다급하고 절실하다. 지난해 지방선거 직전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을 겨냥한 경찰 수사가 청와대 하명(下命) 수사였다는 의혹까지 터진 상황이다. 검찰은 청와대 심장부까지 칼날을 겨누고 있다.
물론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친문 핵심인 당시 백원우 민정비서관에게 김기현의 비리첩보를 받아 경찰에 보낸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반부패비서관실의 업무 범위를 넘어선 민간인 사찰이 의심스럽다. 대통령 절친인 송철호의 울산시장 당선을 위해 경찰 수사를 유도했다면 징글징글한 ‘국정의 사유화’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검찰의 청와대 수사는 공수처로 이관된다. ‘조국보다 윗선’이라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특별감찰 무마 수사 또한 공수처로 넘어갈 것이다. 대통령이 공수처장을 임명하기 때문에 수사와 기소는 윗분의 뜻을 받들어 조용히 뭉개질 공산이 크다.
우리들병원의 특혜 대출 의혹을 비롯해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온갖 비리 의혹이 튀어나와도 검찰은, 국민은 눈과 귀를 가려야 한다. 그러자고 집권세력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공수처를 설치하려는 것 같다. 개돼지에게 잠깐 욕을 먹고 군소야당 요구대로 의원 정수를 늘려주거나, 제1야당 요구대로 선거법 개정을 포기하면 빅딜은 가능하다.
여당과 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가칭)은 어제 한국당을 뺀 ‘4+1 협의체’에서 공수처 단일안 만들기에 들어갔다. 위헌적, 반(反)민주적 공수처를 선거제와 거래해 자기네 밥그릇 키우겠다는 야당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한국당이 합세해 공수처의 기소권을 없애는 식으로 독기를 뺀다 해도 ‘정권 보위처’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야만의 트랙 위에서 한국당이 사는 길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것밖에 없다. 선거법 개정 막겠다고 삼권분립까지 위협하는 공수처를 허용하는 것은 당신들 금배지 지키기에 불과하다. 현행 선거제로 총선을 치른대도 지금 같은 한국당은 승리 못 한다. 집권해서 공수처를 없애면 된다는 한국당의 착각이 더 놀랍다.
현행 선거제인 소선거구제 선거법 개정안도 1988년 3월 8일 새벽 2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날치기로 통과됐다.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이 전국구 의석(75석)의 절반을 가져가는, 기울어진 운동장법이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여소야대(與小野大)를 만들어 여당을 응징했다. 국민의 현명함을 모두가 믿고 힘을 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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