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북한에서 사기당한 중국인 사업가 50여 명이 시위를 하려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평양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고려호텔에 들어왔다. 고려호텔에서 노동당 중앙당사 정문은 400m 정도 떨어져 있다. 중앙당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면 당국이 대책을 세워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들이 호텔 앞에서 시위를 벌이려 할 때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북한 관광 가이드 두 명은 필사적으로 이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군용차 한 대가 이 광경을 봤다. 군관 두 명이 내리더니 차에 시동을 걸 때 사용하는 쇠막대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시위대에 달려들어 마구 때렸다. 중국인들은 혼비백산해 호텔로 도망쳤다.
다음 날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은 “군인들의 폭행에 우리 공민 여러 명이 다쳤다”고 항의했다. 북한은 사과했다. 정작 김정일은 “군관들이 진짜 배짱이 좋다”며 특진시켜 주었고,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22년이 지난 요즘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고 있다. 평양시내 여러 호텔에는 떼인 돈을 받겠다고 들어와 버티는 중국 상인들이 적잖다. 몇 년씩 버티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으로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있는 만수대 언덕에 올라가 난동을 부리는 중국인도 있다. 이런 일이 김정은에게 보고되면 대외적 위신을 하락시켰다는 이유로 채무자는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중국인도 입국이 금지돼 북한에 다시 올 수 없다.
이런 분쟁 처리는 중앙당 해외사업부가 담당한다. 북한 간부들은 이런 일을 처리하는 대가로 뒷돈을 받는다. 이는 북한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요즘 이런 분쟁 중재에서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는 여인이 나타났다. 최선희 국무위원 겸 외무성 부상의 조카 최수경이다. 최선희의 오빠가 중앙통계국 국장인데, 그의 딸이다.
최수경은 대중 석탄 수출을 하는 무역기관에서 일했다. 대북 제재로 석탄 수출이 막히자 새로운 돈벌이를 위해 ‘해결사’로 변신한 셈이다. 그는 평양에서 버티는 중국인들을 만나 사연을 듣고 관련 내용을 최선희에게 전한다. 떼인 돈을 받아주면 총금액의 30∼50%를 수수료로 받는다.
중국인들은 최선희가 실세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최수경에게 적극 매달린다. 북한 관계자들도 최선희가 개입하면 어떻게 하든 돈을 갚아주려 한다. 최선희가 김정은에게 말하면 회사는 사라지고 자신은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이 해결되면 최수경은 수수료를 받고, 상당 금액을 최선희에게 건넨다. 이런 식으로 최선희가 챙긴 돈이 수십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북한에서 최선희식 비리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권력을 가진 간부 거의 대부분이 권력을 이용해 뒷돈을 챙기기에 바쁘다. 다만 대북 제재를 풀어야 할 최선희가 대북 제재로 어려워진 북한 업체들에서 돈을 받는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 김정은은 요즘 원산갈마관광단지 조성을 위해 쓸 돈이 없어 고민인데, 최측근은 몰래 달러벌이에 열심인 모양새다.
최선희는 남쪽 신문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비리 사실이 폭로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사실 이 얘기를 쓸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의 전임 한성렬 부상도 뇌물죄로 처형됐었다. 하지만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최선희가 최근 보여준 일련의 행동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이 끝난 뒤 외무성은 회담 파탄의 책임을 통일전선부와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리며 그들 때문에 김정은이 망신당한 것처럼 몰아갔다. 그 결과 올해 5월 김영철은 당 책벌을 받고 통전부장 자리에서 밀려났다. 김성혜 실장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고, 김혁철 전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와 박철 아태 부위원장은 출당·철직돼 가족과 함께 지방에 추방됐다. 외무성의 입김이 커지면서 남북 관계도 파탄 났다. 요즘 외무성도 매우 초조해진 듯한 느낌이다. 시간은 하염없이 가는데 성과가 없다. 김계관 외무성 고문과 최선희는 요즘 미국을 압박하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지난 칼럼에서 리영호 전 북한군 총참모장의 실각 내막을 자세히 다룬 뒤 김정은은 북한 장성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시켰다. 정보가 새나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통전부의 복수를 해주는 듯한 이 칼럼이 나가면 통전부나 외무성 간부들의 스마트폰 사용도 금지될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스마트폰을 쓰는 것과 이 칼럼은 전혀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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