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공 수업에서는 학생 몇 명이 전자노트로 필기를 했으나 올해는 거의 절반의 학생이 전자노트에 필기를 한다. 휴대전화에 필기하는 학생들도 있다. 작은 휴대전화 화면을 손으로 확대하고 움직여가며 전자펜으로 필기를 한다. 나머지 절반의 학생은 아직 종이노트에 샤프와 볼펜으로 필기를 한다.
나 역시 연필과 노트로 강의 노트를 만든다. 연필의 촉감이 좋기도 하고 글씨를 쓸 때의 사각거림이 좋아 연필을 아직까지 고집하고 있다.
오랜 유학 생활에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면서 대학 시절 필기한 전공수업 노트를 발견한 적이 있다. ‘당시에 이런 수준 높은 것도 배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당시 교수님의 멋진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침 같은 과목을 가르치게 되어서 수업의 방향을 정하는 데 예전의 노트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지금 학생들이 적는 전자노트 파일은 아마도 다양한 디지털 변환을 통해 클라우드에 누적되어 핵분열을 하듯 또 다른 디지털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더 빠른 속도로 지식의 확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디지털 자료들이 종이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1995년 일본 유학 시절에 전자상가에 진열된 15인치 컴퓨터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를 처음 봤다. 액정의 광학적 성질을 이용한 LCD 모니터였다. 샤프에서 처음 나온 이 모니터는 당시 내 한 달 치 월급이었다. 음극선관 브라운관 디스플레이가 바위처럼 큰 몸집으로 책상을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얇게 만들 수 있을까 하고 한참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실제 디스플레이의 역사는 그 시점에서부터 급격히 바뀌어갔다. 더 얇아지고, 넓어지고, 가벼워지고, 선명해지고.
지금은 유기물을 이용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가 대세다. OLED는 유리나 플라스틱 위에 유기물 발광층을 증착해 전기를 흘려보내면 전자와 정공이 재결합하면서 빛이 발생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기판으로 유리 대신 플라스틱 기판을 사용하면 더 얇아지고 유연한 디스플레이로 발전할 것이다. 화소 수 역시 8K TV가 일반화되면서 인간의 눈으로 구별하기 힘든 고화질 해상도의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5세대(5G) 통신기술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개방된 인터넷에서 방송 프로그램과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이제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더 빨라지고 문자, 그래픽, 음성, 이미지, 동영상 등의 다양한 미디어가 거미집처럼 연결된 하이퍼미디어 세상이 되고 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면 커피를 마시면서 책상에서 연필을 깎는다. 강의시간 이외에는 하루 종일 실험실에서 컴퓨터로 작동되는 실험 장치와 씨름을 한다. 실험이 끝나면 컴퓨터에 수많은 데이터가 쌓인다. 이 데이터를 다시 컴퓨터를 이용해 수학적으로 분석한다. 연필, 종이, 커피 이외에 전부 디지털 세상이다. 언젠가 나 역시 전자노트를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다. 그 전까지는 연필과 종이, 커피의 시간을 조용히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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