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민과의 대화’라는 행사가 열렸다. 정치적 소통을 위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 300명과 대통령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행사 주최 측에서는 “세대·지역·성별 등 인구비율을 반영했으며 노인, 농어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지역 국민들을 배려했다”고 밝혔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300명의 표본집단을 과연 어떻게 뽑아낼 수 있을까, 대통령에게 궁금한 300명을 무작위로 뽑으면 그게 전체 국민과의 대화에 부합할까 잘 모르겠다.”
과거 정권하에서도 국민과의 대화 같은 행사는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한 명에 불과한 대통령이 과연 어떻게 국민 전체와 만날 수 있을지는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공화국 이전 왕조 국가에서도 존재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현재 ‘인간 정조, 군주 정조’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그곳에서 정조의 서첩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萬川明月 主人翁 自序)를 볼 수 있다.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는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尊德亭)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예 정조의 어필을 판각해서 서첩으로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만(萬)이란 꼭 1만 개라는 숫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많다는 뜻을 나타낸다. 많은 하천에 비친 하나의 밝은 달이라는 뜻의 만천명월(萬川明月)은 단 한 명인 군주가 많은 사람들을 적절히 응대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가 어떻게 많은 사람을 상대할 것인가. 이는 정치인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세종대왕이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편찬한 한글 시가집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보라. 여기서 월인천강이란 무슨 뜻일까?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함께 합쳐져,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명칭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월인석보 첫 부분에 월인천강의 뜻 해설이 나온다.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ㅱ야 敎化ㅱ샤미 ㅱ리 즈믄 ㅱㅱ매 비취요미 ㅱㅱ니라’(부처가 수많은 세계에 몸을 바꾸어가며 교화하는 것이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 즉, 월인천강이란 단 한 명인 부처가 수많은 곳에 관여하는 양상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기에 부처는 백억신(百億身)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만’이든 ‘천’이든 ‘백억’이든 모두 구체적인 숫자를 뜻하기보다는 많다는 의미, 혹은 전부라는 의미를 담는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뿐 아니라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일분수’(理一分殊)와 이어져 있기도 하다. 이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는 하나이지만, 그 발현은 많은 대상에 각기 이루어진다는 이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리학자들은 많은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사용하곤 했다. 부분에 불과한 개체들이 이 세상 전체를 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군주는 군주대로,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매료되었다. 부분에 불과한 자신이 저 많은 이들, 저 거대한 전체를 전유할 수 있다는 ‘영웅적인’ 가능성을 보여주는 관념이었으니까.
월인천강, 만천명월, 이일분수 모두 선명한 이미지를 전하는 표현들이지만, 월인천강지곡이나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는 관련된 도상(圖像)을 싣고 있지 않다. 따라서 월인천강이나 만천명월이나 이일분수를 떠올리려면 다른 이미지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로쿠주요슈메이쇼즈에’(六十余州名所도會) 연작을 보라. 이것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가 1853년에서 1856년에 걸쳐 제작한 목판화인데, 일본 68개의 지방과 수도인 에도를 묘사하고 있다. 그중에 ‘시나노 사라시나타고토쓰키 교다이산’(信濃 更科田每月 鏡臺山·사라시나 밭에 비친 달)이라는 그림이 바로 여러 곳에 동시에 비친 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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