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이후 2000년의 경험 더 축적했는데도 변하지 않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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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12월 2일 16시 26분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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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한나라 무제의 과도한 전쟁과 그로 인한 극심한 재정낭비, 공을 세운 신하도 사소한 트집을 잡아 처벌하거나 좌천시키는 냉정한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전쟁과 통치스타일이 서로 간에 영향을 주면서 한무제가 더 가혹하고 각박하게 통치하고 백성들은 살기 힘들게 됐다고 본 것 같다.

사마천 자신은 이 두 가지의 희생양이었다. 사마천은 흉노 전쟁 가운데 발생한 명장 이광 일가의 비극에 동정적이었다. 한무제가 이광의 아들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했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홀로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은 한무제의 통치를 비판하는 대신 그 반대였던 한무제의 조부 문제의 통치를 칭송한다. 문제는 신하들이 남월과 조선이 한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으니 정벌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이렇게 말한다. “병기는 흉기요. 무력으로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벌이면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을 먼 국경으로 보내야 하오.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사마천은 전쟁 대신 평화를 택한 덕에 문제 시대에 백성들은 조세부담이 적었고, 농사에 충실해 물자가 풍부해져 삶이 윤하고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마천이 맹목적인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사기 율서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집안을 다스릴 때 훈계와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릴 때 형벌을 버릴 수 없고, 천하 차원에서 정벌(전쟁)을 폐할 수 없다. 단지 운용을 정당하고 적절하게 해야 한다.”

사마천이 굳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세상사를 몰라 함부로 덕치를 말하고 무조건 용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하다가 나라를 잃거나 외적의 침공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는 사례가 충분히 있는 데도 이런 부류의 지식인들은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우리는 사마천 이후 2000년의 경험을 더 축적했는데도 그렇다.

임용한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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