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송년회에서 만난 한반도 전문가들의 화두는 단연 김정은의 ‘새로운 길’이 무엇이냐다. 스스로 미국에 선포한 연말 시한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북-미 정상회담이 ‘짜잔’ 하고 열릴 가능성은 없는 듯하다. 미국도 북한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향해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와 2019년 2월 하노이, 6월 판문점에서 김정은을 직접 대면하고 비핵화 진정성이 ‘1도 없음’을 파악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은 ‘달랠 수 없다면 흔들어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부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하며 체제의 빈틈을 찾는 데 열심이라는 전언이다. ‘레짐 체인지’와 ‘한국에 의한 통일’이 북한 비핵화의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대북정책의 비전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북한은 “생존권과 발전권을 보장하라”며 시위만 하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는커녕 ‘비핵화 로드맵’도 내놓을 생각이 없으면서 한미 군사 동맹을 말하는 적대시 정책 폐기와 제재 완화를 요구하며 급기야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운운했다.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른 장면이 노동신문에 공개된 10월 16일을 전후해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한 액션 플랜이 시작됐을 것이고 3일 김정은의 삼지연 방문도 그 일환일 것이다.
그 ‘새로운 길’이 뭔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공위성을 빙자한 장거리 로켓부터 발사해 재선에 도전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한다는 ‘무력시위 재개설’에서부터, 중국 및 러시아 등 우방들과 밀착해 살길을 모색한다는 ‘다자외교 강화설’ 등 다양하다. 그 무엇이든 잘될 것 같지 않다. 대화하다 안 통하면 도발하는 버르장머리를 알아버린 트럼프 행정부가 맞장구쳐줄 것 같지 않다. 미국의 압박 앞에 제 앞가림도 벅찬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이라는 리스크를 들고 춤을 출 리도 없다.
분명해진 것은 2018년 1월 1일 김정은의 신년사로 시작된 2년 동안의 비핵화 북-미 대화 국면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당초 김정은의 지고지순한 목적은 ‘핵을 가지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다. 그가 가려는 ‘새로운 길’이 무엇이든 ‘핵을 가진 채 제재 해제를 추구한다’는 쉬운 길이 막히자 ‘핵을 가진 채 제재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큰 틀 안에 있을 것이다.
사건의 흐름은 북한 비핵화를 믿고 기대했던 이상주의자들의 판정패 쪽이다. 반면 권력과 안보를 추구하는 인간, 국가의 숙명을 이야기하는 냉담한 현실주의자들은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고 있다. 스위스 유학파 김정은이 비루한 국가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개발한 핵을 슬기롭게 포기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를 유포한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내년엔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을까.
지난해 3월 평양에 다녀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 세계에 홍보하고 다닌 대통령 특사단은 “상대의 말을 믿지 말고 의도는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라. 그 대신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능력에 주목하라”는 현실주의의 가르침을 몰랐거나 아니면 무시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무정부적 국제정치 구조가 제기하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기만과 사기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국가의 특권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미국 시카고대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저서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에서 “정치적인 계산은 경제적인 계산을 압도한다. 생존하지 못한다면 번영할 수도 없다”고 갈파했다. 시대착오적인 1인 독재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핵을 ‘체제 수호의 보검’이라 부르는 김정은 체제가 경제 발전을 위해 핵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장난일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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