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은 적극 해명에 나서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이나 여당 당직자까지 실명으로 하명수사 의혹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해명할수록 의혹만 더 키운다는 비판이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반면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에 대해선 대조적이다. 검찰의 청와대 압수수색 때 서면 브리핑을 낸 것이 겨우 눈에 띌 정도로 신중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에 대해선 청와대가 자체 조사 결과까지 조목조목 발표하면서 대응한 것과도 비교가 된다.
검찰 수사가 막바지에 접어든 상태에서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하지만 유재수 사건에선 친문 실세들의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유재수는 문재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백원우를 포함해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천경득 행정관도 등장했다. 유재수가 연고도 없는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발탁되는 과정에서 ‘부산파’ 핵심인 이호철도 거론된다. 이러니 유재수 사건을 계기로 친문 ‘이너 서클’이 드러났다는 얘기가 나도는 것이다. 이들이 끈끈한 인간관계로 각종 인사 내용을 협의했다면 ‘시스템 인사’ 원칙을 허문 국정 농단으로 번질 수도 있다. 검찰이 쥔 ‘히든카드’를 알 수 없으니 더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
천경득은 2년 전 유재수 감찰에 나선 이인걸 당시 특감반장에게 “피아(彼我) 구분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친문 실세인 유재수 감찰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검찰 수사에서 감찰 무마 과정이 가려지겠지만 피아를 구분하라는 기준도 작동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치 정권의 부역자’로 알려진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美)와 추(醜)’의 대립이 본질적인 잣대가 되듯 ‘적과 동지’ 구별이 정치 행위의 냉철한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친문 핵심들의 ‘피아 구분’ 발언도 슈미트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피아 구분이 엄연한 사실 관계까지 비틀어 부정과 비리까지 감싸야 한다는 논리는 비약이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 정파가 치열하게 경쟁하라는 것이지 동지의 잘못까지 옹호하라는 온정주의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석 달 넘게 온 나라를 뒤흔든 조국 사태에서 상식이 무너지고 피아 구분의 정치적 메시지가 어떻게 변질됐는지 국민들은 똑똑히 지켜봤다. 이전 정권에 대해선 거침없던 잣대가 왜 자신들을 향할 때는 달라져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다. 약자와 사회적 소외계층을 대변해 기득권층을 공격한다는 70, 80년대 과거 낡은 운동 방식만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친문 세력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정 주도 세력이자 기득권층이 되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듯하다. 사고가 과거 군부정권에 맞섰던 운동권 정서에서 멈춰버린 것 같다.
친문 지지층의 응집력은 여당 의원들이 눈치를 살펴야 할 정도로 세다. 그렇다고 해서 국정이 대학 서클처럼 운영될 수는 없다. 남 탓, 야당 탓만으로 피아 구분을 해서 어떻게 영(令)이 설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반환점을 돌았고 적폐청산의 시효도 사실상 끝났다. 국정을 주도하고 책임지는 세력은 자신과 내부의 문제에 더 엄격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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