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시장통에서 술을 참 많이 마셨다. 20대 초반의 우리는 항상 술이 고팠지만, 돈이 없었다. 친구들 네다섯이 소주를 열 병 이상씩 마셨지만, 안주는 1만∼2만 원 하던 감자탕 하나밖에 못 시켰다. 이모는 인심 좋게 고기 몇 덩이를 더 얹어 줬고, 웃으며 국물을 매번 채워 줬다. 밤이 깊어갈수록 감자탕은 졸아서 국물인지 기름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졸아드는 감자탕 국물처럼 우리의 우정도 찐득해졌다.
술자리에서 친구 하나가 ‘생동성 아르바이트’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믿을 만한 제약회사에서 진행하는 것인데, 2주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주는 약을 먹고 피 검사만 받으면 1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과학적으로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솔깃했다. ‘감자탕에 닭똥집, 오돌뼈까지 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안고 지원했지만, 우리는 당시 흡연자여서 탈락했다. 그때의 쉽게 버는 돈에 대한 부푼 감정은 추억으로 마음 한구석에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한 의뢰인 때문에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늦은 밤 잠결에 의뢰인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고, 비몽사몽 유치장 접견을 갔다. 의뢰인은 ‘위챗’이라는 앱을 통해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았는데 지하철역 사물함에 넣어둔 체크카드를 꺼내 현금인출기에서 출금하고, 지정 계좌에 송금하는 간단한 일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의뢰인은 그 일이 탈세 혹은 도박장 운영에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의심했지만, 손쉽게 벌 수 있는 돈이 탐났다고 했다. 의뢰인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3일째 ‘보이스피싱’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받은 돈은 고작 49만 원이 전부였다.
의뢰인은 법적으로 공동정범(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공동으로 실행한 사람)으로 판단되기에 비록 범행 제안자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피해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사기를 친 것도 아니며, 그 아르바이트가 ‘보이스피싱’ 범행인지도 몰랐음에도 실형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런 뻔한 결과와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돕는다는 도덕적 갈등 때문에 주저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버는 돈에 대한 유혹의 강렬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결국 이 철없는 청년의 변호인이 되기로 했다.
전화로는 피해자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울산으로 내려갔다.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한참을 읍소했다. 피해자는 덤덤하게 듣더니 처벌불원서를 내어주며 “그럼 그 청년 말고 전화해서 사기를 쳤던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었다. 거짓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그 사람은 체포되기는커녕 외국에서 떵떵거리며 살면서 지금쯤 대신할 다른 청년을 찾고 있을 거라고 답할 수도 없었다. 무력감을 느꼈다.
감자탕도 속 시원히 시켜 먹지 못하는 청년들은 쉽게 버는 돈에 대한 유혹에 약하다. 만약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면 일단 멈춰서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으면 좋겠다.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필자에게 연락을 줘도 된다. 청년들이 유혹을 뿌리치면 철없는 인출책은 없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그 범행 제안자도 결국 잡히지 않을까. 두 번 다시 같은 무력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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