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거시기’란 말이 있다. 사전을 찾으면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나온다. 사투리 같지만 국어사전에 등장하는 어엿한 표준어다.
몇 해 전 어느 최고경영자(CEO)가 거시기 소통론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아들 3형제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야 거시기야 거시기네 집에 가서 거시기 좀 빌려 와라”고 하니까, 둘째 아들이 지체 없이 “알았습니다” 하고 일어나 옆 동네 삼촌댁에 가서 밭 갈 때 쓰는 쟁기를 빌려 왔다는 것이다.
이 가족은 아버지에게 그 시간대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버지의 그때그때 지시를 누가 담당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셈이다. 거의 완벽한 의사소통이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려면 평소 많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거시기 소통론의 핵심 포인트다. 그 CEO 재직 기간에 회사가 크게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반대의 경우도 많다. 어느 CEO는 소통을 중시하겠다며 직원들과 자주 미팅을 했는데, 1시간을 대화하면 혼자 50분 이상 얘기하고 나머지는 듣는 시늉만 했다. 직원들을 자주 만나겠다는 뜻은 좋지만 자기 얘기만 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고문이다. 결국 그 CEO는 실패한 경영자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진정한 소통 능력은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말을 잘 듣는 능력이다. 이른바 경청과 공감이다. 요즘 기업들은 이런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려 한다. 채용과정에서 토론면접을 해보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상대방의 말은 아예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반복한다. 일부는 경청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방이 말할 때 눈을 맞추며 주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이는 듣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일 뿐이다.
경청의 핵심은 상대방 발언 내용을 실제 잘 듣고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따라서 면접 때는 상대방의 발언을 잘 파악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그냥 의례적으로 “잘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라는 말씀이죠?” “○○○라고 주장하셨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지요?” 등 상대방의 얘기를 충분히 듣고 이해했다는 것을 확인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은 셋째 아들 이건희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경청이란 휘호를 직접 써서 건넸고, 이건희 또한 아들 이재용에게 같은 휘호를 써줬다는 것은 재계에선 이제 유명한 일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삼성 가문의 내공을 느끼게 해주는 한 대목이다.
정치권이건 기업이건 요즘 무슨 일만 생기면 소통 부족을 탓한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참 거시기한 세상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