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처음 북한에 갔을 때 당국자들이 신원 확인을 깐깐하게 하면서 한국계 아내의 이름을 묻더군요. ‘이미자’라고 했더니 갑자기 왕처럼 떠받들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하던 가수 이미자 씨라고 착각한 겁니다.”
2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만난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이 말부터 꺼내며 껄껄 웃었다. 그는 국무부 재직 시절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근무했다. 세 나라 언어에 능통한 데다 총 8차례 방북 경험까지 있어 미 외교가의 최고 아시아통으로 꼽힌다. 2007년 퇴직 후 한미 관계 증진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을 지냈고 현재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과 칼로스 구티에레즈 전 미 상무장관 등이 설립한 전략자문회사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ASG)의 선임국장 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미 외교협회(CFR) 객원 연구원을 맡고 있다. 》
그는 “올해가 한국 관련 업무를 시작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지금도 매일 한국 주요 언론과 북한 노동신문의 기사를 한글로 읽는다”고 했다. 한국계 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둔 그는 부인이 만들어 준 된장찌개가 최고의 음식이라고도 밝혔다.
뉴욕 인근 뉴저지주에 거주하는 그는 이날 브루킹스연구소가 주최한 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차로 약 4시간 거리인 워싱턴을 찾았다고 했다. 이날 만남 이후 이메일 및 전화 인터뷰를 통해 남북한에서의 경험담,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50년간 한반도 업무를 해온 동력은 무엇인가.
“1969년 미 공군에서 복무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곧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에게 매료됐다. 한국어와 한국사를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은 열망이 내가 한반도에 집중한 원동력이었다. 1997년 미국의 평양 주재 연락사무소 개설도 준비했다. 사무소 개설로 이어지지 못해 지금도 상당히 아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해 6월 1차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연락사무소 개설이 준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이 놀랍다.
“돌이켜보면 북한이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에 따른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 등 약속을 이행하고 당시 합의대로 미 워싱턴과 북한 평양에 연락사무소가 개설됐다면 오늘날 북-미 관계도 극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의 한 시인이 말했듯 가장 슬픈 말은 ‘그럴 수도 있었을 텐데(It might have been)…’일 것이다.”
―북한에서의 경험 중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2008년 2월 평양에서 열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성사시켰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북한 측에서 직접 우리 쪽에 전화를 걸어 ‘뉴욕 필하모닉을 초청하고 싶다. 도와 달라’고 했다. 치열한 준비와 협의 끝에 북한과 미국의 국가가 순서대로 연주돼야 한다는 우리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평양 무대 위에서 미국 국가가 울려 퍼졌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단 평양 청중이 벌떡 일어나 꼿꼿한 자세로 미국 국가를 듣고 있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북한 주요 인사들과의 인연도 남다르다고 들었다.
“현재 북-미 비핵화 협상의 북한 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와는 1998년 뉴욕에서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인연이 있다. 그와 리근 당시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사가 우리 집까지 와서 아내가 해준 된장찌개를 먹고 술도 마셨다. 당시 김명길은 놀랄 만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북한 정권에 대해 문제 될 발언은 하지 않아 천생 외교관이라고 느꼈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과도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다. 최 부상과는 북한과 미국이 함께 참석하는 세미나 등에서 여러 번 만났다. 한성렬, 강석주, 리용호, 김영남, 김계관 같은 북한 주요 인사들과 여러 번 솔직한 대화들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북한의 한 당국자가 다가와서 ‘우리 지도부가 당신이 주요 매체에 쓴 글 등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고 있다’고 말해줬다. 북한을 비판하거나 적대적인 글을 쓰지 말라는 사실상의 협박과 경고였다. 어떻게 대응했냐고? ‘칭찬해줘서 고맙다’고 응수했다.”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하며 설정한 올해 말 시한이 불과 약 20일 남았다. 협상의 진전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매우 낮다고 본다. 북한은 실무 협상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직접 만남만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성사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미 빈손으로 돌아온 전력이 있다. 그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다시 만났음에도 또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미국 내에서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연말까지 양측이 진전을 보지 못하면 북한이 내년에 미 본토를 직접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ICBM 발사는 중대한 도발이 될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맺어 온 외교를 끝내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인들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 여러모로 북한에 위험한 결과가 될 것이다. 이 외에도 북한의 인공위성 및 중거리 미사일 발사 같은 연말 ‘크리스마스 기습’에도 대비해야 한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북한 지도자 세 명의 발언은 지금껏 ‘토씨 하나까지’ 꼼꼼하게 다 챙겨 읽었다고 밝혔다. 먼저 영문 매체에 실린 글을 읽고, 이후 한국어로도 본 후 다시 영어와 비교하면서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김정은 위원장은 한국에 ‘북한과 미국 중 단 하나만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집요한 시도”라고 분석했다.
논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한미 동맹으로 넘어갔다. 그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 협상 등으로 한미의 갈등 수위가 높아지면 내년 한국에서 반미 시위가 거세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며 당시 거세게 몰아쳤던 반미 움직임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한미 동맹이 시험대에 놓였다. 방위비 협상의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아 보인다.
“주한미군을 사실상 용병으로 만들고 한국에 대한 미군의 약속을 수익화하려는(monetize) 현 미국 행정부의 생각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미군은 동맹인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엄숙한 조약은 물론이고 (전쟁) 억제라는 국익을 위해서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다. 5배 증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이 한반도에서 대부분의 전투 병력을 제공하고, 비무장지대를 따라 전선(戰線)을 관리하며 평택 미군기지 비용을 거의 전액 부담하는 등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과도한 증액 요구는 미군을 용병처럼 보이게 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엄청난 악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방위비 협상이 실패하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는데….
“동맹인 한국을 보호한다는 미국의 약속은 결코 재정 문제에 의존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 가치에 임의의 숫자를 할당하려는 시도는 잘못되고, 비뚤어졌으며, 위험한 생각이다.”
―협상 실패 시 반미 시위가 거세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반미주의 움직임이 처음도 아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전후로 일부 미국인과 미군 시설들이 급진단체들에 의해 공격받았다. 미군 2명이 지하철에서 대학생들에게 끌려가 감금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당시 대사대행 자격으로 주한 미국대사관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때 한국 정부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주한미군 예산권을 쥐고 있는 미 의회 주요 인사 3명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 이들이 도착할 때까지 미군 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주한미군 예산을 한 푼도 배정받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군 2명은 다음 날 즉시 풀려났다. 당시 한미 양국은 감금 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했지만 이 사건의 여파 등으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 여단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은 한미 동맹의 어두운 날이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미국 뉴욕 출생 ―미 프린스턴대 졸업 ―주한 미국대사관 차석 및 대사대행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부차관보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 ―현 전략자문회사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그룹 선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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