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 저물고 있다. 올 한 해 건축계가 이룩한 쾌거 중 하나는 9개 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다. 서원은 우리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이제 세계인들의 보물이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살았던 독락당이 서원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서원들과는 차별화된다. 독락당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독락당은 옥산서원에서 물길인 자계(紫溪)를 따라 700m 서북쪽에 위치한다. 옥산서원이 회재의 제자들이 회재 사후에 그를 기념하며 지은 건축(1573년)이라면, 독락당(1532년)은 회재가 살아 있는 동안 지은 건축이다. 그래서 독락당을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회재와 건축가로서의 회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회재는 3번에 걸친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는 10세 때 아버지가 죽었고, 둘째는 41세 때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관직을 박탈당해서 낙향했고, 셋째는 57세 때 ‘양재역 벽서 사건’(을사사화 2년 뒤 발생)에 연루돼 평안도 강계로 유배 갔다.
회재는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부친의 타계로 어려서부터 인간의 죽음 문제를 생각하며 자라 최상급 지성인이 되기 위한 밑바탕을 남보다 일찍 마련하였고, 낙향해서는 불후의 건축 명작 독락당과 계정(溪亭)을 지었고, 유배 가서는 유학사에 길이 남을 구인록(求仁錄) 등과 같은 명저를 썼다. 비록 유배지에서 죽었지만, 훗날 그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이라 불리며 성균관 문묘에 위패가 안치됐다.
건축적으로 독락당은 3가지가 돋보인다. 첫째는 산수다. 독락당은 동북쪽의 화개산을 주산으로, 서북쪽에 도덕산이 있고, 서쪽에 자옥산이 있고, 동쪽에 어래산이 있다. 산들은 독락당이라는 소우주를 감싸는 대우주다. 또 화개산에서 발원한 물길인 자계는 북으로 들어와 남으로 흘러 내려간다.
독락당의 절정 공간인 계정이 위치한 곳에서 자계는 바위가 패어 널찍한 물웅덩이를 형성한다. 맑은 물이 판석에서 나오는 암분으로 오묘한 옥색(자계천은 옥류천이라고도 한다)을 띤다. 이를 관조할 수 있는 점이 이곳에 계정을 지은 직접적인 동기였으리라.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회재가 물길을 따라 5곳에 지은 이름들이다. 옥산서원 앞 물웅덩이를 세심대(洗心臺)라고 지었고, 계정 앞 물웅덩이는 관어대(觀魚臺)라고 지었다.
둘째는 담장이다. 독락당 일곽은 눈 목(目) 자를 형성하며 3개의 마당을 가지고 있다. 앞마당에 행랑채가 있고, 중앙 마당에 회재의 독서 공간인 독락당이 있고, 안쪽 가장 깊숙한 마당에 휴식 공간인 계정이 있다. 마당을 구획하는 선들이 흙담인데, 앞마당과 중앙 마당 사이에는 다른 곳과 다르게 담장을 두 겹으로 두어 흙담 길이 만들어졌다.
이 점이 독락당을 ‘길(道)을 품은 집(家)’으로 보이도록 하고 있고, 더 나아가 사람(人)이 사는 집이 사람들(仁)이 모여 사는 마을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다. 흙담 길 끝은 자계로 열려 있고, 개울로 나가기 전에 담장의 협문을 열고 모서리를 돌면, 독락당이 나오고, 더 들어가면 계정이 나온다.
셋째는 계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회재에게 아버지 이번(李蕃)이 남긴 정자(현 계정 자리에 있었던 정자)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회재는 독락당 일곽이 계정에서 원심형으로 퍼져 나가도록 증축했다. 아주 귀한 손님이 와야지만 열어주는 계정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회재의 깊은 속마음같이 독락당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회재가 계정에 쏟은 정성도 남다르다. 물길과 가급적 가까워지도록 3칸 집을 계곡에 걸터앉게 디자인했다. 정자는 아주 작고 낮다. 하지만 자계를 향해 트여 있어, 전혀 답답하지 않다. 계정은 한 발은 뭍(세속)에 두고 있고, 다른 한 발은 물(탈속)에 두고 있는 경계의 건축인데, 회재는 자연과의 만남을 책과의 만남만큼이나 의미를 두었다.
구인록에 따르면 사랑(仁)을 구하는 사람은 하늘과 하나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없어도 많고, 죽어도 산 사람이다. 회재에게 계정은 그런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계정과 같은 구인(求仁) 건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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