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우리는 ‘무섭다’ 말한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일 때, 우리는 ‘슬프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프다도 답이 아니다. 단 세 글자로 된 말은 너무 좁다. 뭐랄까. 허무하고, 가엾고, 안쓰럽고, 미안하고, 쓸쓸하고, 아프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족하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이기까지 걸었을 길을 생각하면 세상 모든 말을 합해도 닿지 않는다.
절망은 전염된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온몸이 굳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절망의 순간이 이 시에도 나와 있다.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시인은 절망의 심연을 보았다. ‘살아 보니 허무하더라. 네가 애써 살아봐도 허무할 것이다.’ 벗과 선배와 이웃이 이런 증언을 해온다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절망에 앞서 싸우는 이야기가 시에 담겨 있다. 시인은 인생이 전혀 허무하지 않다고 반박하지 않는다. 그래, 허무하다. 그러나 그 허무함을 딛고 ‘살아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가장 소중한 가치다. 전파된 허무의 믿음에 대항하여 시인은 생명의 믿음으로 싸워 나간다. 세상이 저주스러울 때, 이 싸움의 기록이 구원이 된다. 때로, 구원은 정말 사소한 곳에서 온다. 우리의 신은 아주 작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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