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던 시절 대만 출신의 린하이펑(임해봉) 9단은 신과 두려면 넉 점은 먼저 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수십 년 뒤인 2016년 구글의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류는 ‘바둑의 신’을 현실에서 목격하게 됐다.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국을 펼친 알파고는 이 9단에게 4승 1패를 기록했고, 이듬해 5월 업그레이드된 알파고는 세계 1위 중국의 커제 9단을 3연패시키고, 정상급 기사 5명과의 단체대국도 불계승을 거뒀다. 알파고-커제 대국을 지켜보던 정상급 고수들은 “앞으로 인간이 알파고를 이길 희망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아마도…”라며 말을 흐렸다.
▷그 후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은 더 높은 고수의 경지에 올랐다. 현재 중국의 텐센트그룹이 알파고의 딥러닝 방식을 본떠 개발한 줴이(絶藝)가 AI 최고수 왕좌이고, 칭화대가 개발한 ‘골락시’에 이어 한국의 ‘한돌’ ‘바둑이’, 일본의 ‘AQZ’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기력 측정을 하는 Elo 레이팅에 따르면 인간 최고수는 3600점대인데 줴이는 5000점, 한돌도 4800점을 찍었다. 이론적으로 레이팅이 400점 이상 차이 나면 호선바둑(맞바둑)이 불가능하다.
▷이세돌 9단이 18일 ‘한돌’과의 1번국에서 불계승을 거뒀다. 이 9단이 2점을 깔고 두는 접바둑이었지만 덤 7집 반을 한돌에게 주는 것이어서 실제 치수(置數)는 1.5점에 불과했다. 다들 한돌의 우세를 점쳤다. 그런데 한돌이 갑자기 무리수를 뒀다. 이 9단은 이것을 정확히 응징해 한돌의 항복을 받아냈다. 공교롭게도 이 9단의 응징수가 78번째 수였다. 이 9단이 알파고와의 대결 4국에서 이겼을 때 역전의 시발점이 된 ‘신의 한 수’도 78수였다.
▷한돌이 패한 이유는 ‘장문(藏門·돌을 포위해 잡음)’이란 아마추어도 아는 수를 제대로 못 봐 요석(要石) 석 점이 잡혔기 때문이다. 한돌의 실수가 이세돌의 묘수 때문인지, 프로그램의 오류인 버그 때문인지는 모른다. 사실 한돌은 호선바둑만 공부해왔고 접바둑 준비기간은 한 달 반 남짓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어제 호선으로 둔 2국은 이변 없이 한돌 승리였다.
▷AI도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다. AI 바둑으로 프로기사들의 설 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바둑의 재미와 수준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른 분야의 A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세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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