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동터 올랐다. 20세기 이 땅의 역사는 3·1운동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부터 시작됐다. 약육강식의 세계전쟁, 두 쪽으로 갈린 지구,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당당히 항일 투쟁을 벌였고, 분단 전쟁이 낳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새로운 100년, 눈앞에 닥쳐온 인공지능(AI)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자가 될 수 있는 무기 하나쯤은 벼르고 있어야 한다.
최근 독일인 알브레히트 후베 교수의 저서 ‘날개를 편 한글’에서 ‘한글을 지어낸 세종대왕이 컴퓨터의 아버지’라는 글을 읽고 ‘이것이다!’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는 서방 세계에서는 이진법을 찾아낸 독일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1646∼1716)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0과 1 그리고 이진법을 응용해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이 그보다 250년 앞선 ‘컴퓨터의 아버지’임을 주역의 음양오행 등으로 풀이했다.
‘총, 균, 쇠’로 널리 알려진 미국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최근 펴낸 ‘대변동’의 서문에서 “영어는 세계에서 가장 일관성 없고 까다로운 문자 중 하나이지만 한글은 가장 뛰어난 문자”라며 “나를 비롯해 많은 언어학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했다. 그는 올해 10월 한국에 와서도 “어느 나라 문자가 우수하냐고 물을 것도 없이 한글”이라며 “한국은 한글을 창제한 나라이고 한국인은 그 나라의 국민인 만큼 지금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능히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왜 한글인가’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탁견들을 다 꺼내 들 수 없다. 다음 100년 동안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AI와의 경쟁에서 한글이 승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AI는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자를 만들 수도 없다. AI는 인류의 모든 언어를 구사하고 모든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교수가 밝혔듯이 영어(알파벳)는 일관성이 없는 까다로운 언어(문자)다. 한자는 뜻글자인 데다 정자와 간자 그리고 발음기호가 부정확하다. 일본어는 가타카나 히라가나 한자 세 가지 문자를 섞어 써야 하며 역시 발음기호가 한글의 30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AI가 가장 선호하는 언어는 만물의 소리를 다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일 것이다. 다른 문자에 비해 30∼40배의 발음을 가진 한글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자연스럽게 AI의 언어, 문자는 한국어와 한글이 될 수 있다.
AI 세계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어진다. 이 때문에 영어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언어나 문자들과의 경쟁에서 한국어와 한글이 우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영어를 통해 셰익스피어나 헤밍웨이를 전 세계인이 읽었다면 다음 세기는 AI를 통해 한국의 시, 소설을 세계가 읽게 될 것이다.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은 AI와의 대결에서 지고 바둑판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AI가 시, 소설 쓰기 등 문예 창작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실제로 AI가 소설을 썼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꽃으로 말하면 종이꽃이고, 사람이라 해도 밀랍인형일 뿐이다. 가령 AI에게 ‘바다’라는 제목을 주고 시를 쓰게 해 보자. 그러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무수한 ‘바다’를 그린 시들의 표현을 몽타주해서 겉모습은 잘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바다를 쓸 때 그 외연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길어 올린 내포성이 없다면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소설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과 섬세하고 예리하며 공감을 자아내는 심리 묘사를 해낼 수 없다면 속 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바둑판은 19줄×19줄, 361개의 고지를 가지고 집짓기를 하는 것이다. 수학적 조합에서 사람이 컴퓨터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200만 개 낱말의 조합을 컴퓨터는 계산을 해야 하지만 사람은 감성과 직관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몇십만 대가 나서도 사람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시, 소설이 전 세계인에게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탄탄한 콘텐츠가 풍부해야 한다. 이를 만들어 내는 작가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 새 아침이 밝으면 우리나라 주요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로 지면을 덮는다. 일찍이 인류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이자 한글의 나라에서 한국 문학에, 이 땅의 문학인에게, 문학 지망생에게 이는 얼마나 황홀한 축복인가.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가 창간 후 다섯 해를 맞는 신년호에 신춘문예 모집공고를 내고 3월에 당선작을 발표한 것이 신춘문예의 효시였다. 그로부터 신춘문예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신문과 잡지들이 따라서 시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현대 문학사의 대산맥을 탄생하게 만든 산파 역할을 한 것이다.
신춘문예는 단지 신인을 발굴하는 의미만 가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신춘문예는 그 시대의 현장에 발을 딛고 오직 원고지와 모진 씨름을 하는 천재들의 각축장이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시행하던 과거시험을 일컫던 ‘등용문’이었다.
신문마다 기성 문인을 뛰어넘는 천재 신인을 기다렸고 뛰어난 당선작이 나오면 신문사는 물론 온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한국 문학은 신춘문예를 만나 한 단계씩 올라섰다. 한글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선두에 설 작가들은 이렇게 계속 탄생하고 또 성장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는 단군조선 개국 이후 삼국시대까지는 중원으로 국토를 넓혔으나 이후 동북아시아 대륙 작은 반도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1000년 동안 서구 문명과 단절된 채 겨울 눈을 모르는 여름 매미(蟬不知雪·선부지설)였다. 19세기 중엽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미국, 영국 등과 동맹을 맺으며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고 군사대국이 되는 동안에도 우리는 2500년 전에 지은 한문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뒤늦게 19세기가 끝날 무렵인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의 병탐 야욕에 나라를 통째로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어찌 저들의 노예로 천년만년 살 수 있으랴. 우리 겨레의 혼불이 3·1운동으로 타올랐다. 더불어 잘 사는 세상으로 흙투성이 땀투성이 피투성이가 되며 손잡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다음 100년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남북한 8000만 명은 한목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통일!”이라고. 그렇다, 통일이다. ‘상록수’의 소설가 심훈이 1930년 3월 1일에 쓴 조국광복 염원의 시 ‘그날이 오면’은 ‘통일의 그날’로 바꿔도 한 글자도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다.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은 하나 보태기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千)도 되고 만(萬)도 되는 것, AI란 호랑이를 타고 지구촌을 누빌 한국어와 한글은 ‘통일 한국’이라는 용을 타고 지구촌 하늘을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누가 이 눈앞에 활짝 펼쳐질 분명한 현실을 꿈이라 하겠는가. 책상 앞에서 원고지를 메우는 시인의 가상현실이라고 하겠는가. 물론 이는 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현실이다.
새 100년 새 아침의 겨레여! 용을 타고 지구촌 하늘을 날아오르는 한글의 나라, 통일 대한민국을 큰 붓으로 그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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