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
<3> 김영민 서울대 교수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김승옥이 이렇게 말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났다. 2020년, 강남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다. 불태울 욕망이 남은 현대 한국인은 대개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현대 한국은 폐허에서 시작했다. 1950년 6·25전쟁 시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는 “인분 냄새만이 진동하는 이 나라에 내가 왜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인분 냄새를 참아가며, 모욕적 언사를 참아가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냉전의 전선을 앞에 둔 국가로서, 자본주의의 성공을 증명해야 하는 첨병으로서,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겠다는 결기를 가진 국민으로서, 자본주의 대국의 하청국 노동자로서, 독재 치하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독재 치하였기에, 눈이 부셔 앞을 볼 수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세계 경제 순위 12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 경제 대국이 도달한 지점은 일종의 ‘번 아웃(Burn out)’ 상태다. 사람들은 지쳤고, 싫은 것은 도대체 더 할 수 없다. 현 지점에 오기까지 정말 말 그대로 미치거나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종신 고용을 거부하는 직장의 소모품으로 살다가 부실한 사회안전망 속으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개처럼 일하며 인생을 살다가 사라진 전 세대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이제는 없다. 다수를 참고 견디게 했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산업화의 성장동력은 고갈되어 가고, 민주화의 정치적 상징 자원은 퇴색하고 있으며, 모든 권위는 빠르게 몰락 중이고, 그 몰락을 틈타 사이비 역사 서술이 창궐한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
아직 힘이 남은 사람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강남으로 간다. 그곳에는 지친 몸이 지대(地代)를 추구하며 누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 옛 한양에서 과거시험이라는 한국인의 푸닥거리가 벌어졌듯이 강남에서는 대학 입시 준비라는 푸닥거리가 벌어진다. 강남에는 대학 입시에 최적화된 학교들이 모여 있기에 자신의 후손에게 사회적 자산을 대물림해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평등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위로 태어나지만, 산다는 것은 ‘삶을 당하는’ 일이지만, 일시에 함께 치르는 대학 입시를 통해 사회적 삶은 공정성과 합리성이라는 신화를 얻는다. 이 욕망의 레이스에서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거나 상승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을 얻는다. 이제 지대를 추구할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개중에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미국의 명문 대학에 자식들을 연이어 합격시킨 부모가 있다. 그들은 이제 강남의 아파트를 세놓고, 자랑스러운 자식과 함께 도미한다. 미국에 도착한 자식들은 꿈에도 그리던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하고, 부모들은 명문 대학에 자식을 보낼 수 있는 가정교육에 대해 강연을 하러 다닌다. 2년 뒤, 자식들이 부정행위로 적발된 끝에 기숙사에서 투신자살을 할 때까지. 김승옥은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서울에서 방황하는 행인의 입을 빌려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강남에서는 대학 입시에 이어 아파트 재건축이라는 푸닥거리가 벌어진다. 강남에는 시세 차익을 크게 남길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들이 남아 있기에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거나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 재건축만 성사되면, 그 차익을 이용해서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도 있고, 아프면 시설이 좋은 병원에 가서 입원할 수도 있고, 자식을 해외로 유학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재건축을 기다리는 강남의 어느 아파트 지하실 철문에는 ‘문을 꼭 닫아 주세요. 모기 물려 아파요’라는 글이 써 붙어 있었다(동아일보 2019년 12월 13일자 기사). 지하실에는 오래 묵은 쓰레기가 악취를 풍기며 쌓여 있다. 그 묵은 쓰레기 위로 녹슨 배수관으로부터 물이 떨어져 고인다. 고인 물에서 모기가 살고, 모기가 사는 지하실 위에서 언제고 떠날 준비가 된 주민들이 산다. 마침내 시세차익을 보아 떠나는 사람들은 이곳에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기에 지하실에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린다. 남은 사람들도 자녀 입시가 끝나면 떠날 아파트이기에 구태여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다. 어차피 재건축될 아파트라고 생각하기에, 집주인들도 거액의 쓰레기 수거 비용을 쓰려 들지 않는다. 집주인들 과반수가 세를 주고 다른 곳에 살기에, 정작 집주인 상당수는 쓰레기와 직면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해서 쌓인 쓰레기가 총 200∼300t. 그 쓰레기는 한국의 사회 계약을 상징한다. 200∼300t 무게의 사회 계약. 떠나는 자는 쓰레기를 남기고, 남은 자는 자신 차례가 올 때까지 쓰레기를 견디는 사회 계약. 누군가 끝내 참지 못하는 순간까지 버티기로 되어 있는 사회 계약.
SF 작가 어설라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며’에도 지하실 이야기와 복지사회를 떠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오멜라스라는 이름의 복지사회는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가 도시를 휘감고 지나며 달콤한 음악이 되어’ 들려오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복지사회의 지하실에는 한 명의 아이가 박약한 상태로 가두어져 고통을 받고 있다. 이 아이가 고통 받는다는 조건 아래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의 풍요와 복지를 지탱하는 사회 계약이기에. 그 아이의 처지를 개선해준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누리는 그 행복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그래서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존재를 견딘다. 그 아이를 방치한 대가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오멜라스의 사회 계약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애써 지하실에 있는 아이를 회피한다. 그러나 그 지하실의 아이를 직면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고통 받는 지하실 아이를 보고서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길로 오멜라스를 떠나 버린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상한 지하실을 가진 복지사회를 떠나 버린다. 혼자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오멜라스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어딘가에 모여 새로운 사회 계약을 만들고 오멜라스와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을까? ‘오멜라스를 떠나며’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현대 한국이라는 이름의 오멜라스에도 지하실에 쌓인 묵은 쓰레기를 직면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지하실에 묶여 고통 받는 이들을 직면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살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1위권이다. 그들은 출산 거부를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국은 인구가 늘지 않아 OECD 국가 중에서 인구 감소 속도가 가장 빠르다. 자신이 속한 곳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이직을 결심하듯이 사람들은 떠난다. 이민을 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거나.
시인 신해욱의 표현을 빌리면,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쓰는 일이다, 수동태의 문장으로 하루에 한 줄씩 삶을 ‘당하는’ 일이다. ‘타성에 젖는 맹렬한 쾌락’에 사로잡히지 않고 능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쓸 때 새로운 공동체는 시작될 것이다. 그 새로운 공동체 사회 계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100년을 맞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벗어나고 싶은 현재가 주는 참담함이 있다. 우리가 건축한 현대는 부실건물이었다. 허겁지겁 베껴온 제도들은 헛돌고 있다. 시민이 대거 출현하는 데 마침내 실패했다. 자신들이 추구할 공동선을 정교하게 정의하는 데 기어이 실패했다. 우리의 성취는 꼭 성취가 아니었다. 새로운 사회 계약은 무엇인가. 미국의 SF 소설가 할런 엘리슨은 자신의 작품에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제목을 붙인 바 있다. 우리는 대답할 입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