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역사 현장[즈위슬랏의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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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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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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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가 좋다. 특히 서울 도심을 걷길 좋아하는데, 어디를 걷든 역사적인 곳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대문 안팎을 걸을 때 작은 비석이나 기념비가 보이면 걸음을 멈춰 잠깐 읽는다. 며칠 전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표지판을 봤다. 이 신문은 1904년에 영국인 특파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로 시작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종로구 화동 138-7번지에는 동아일보 창간 사옥 터 유적비도 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운실버센터 앞은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로 향하다 도착한 곳이다. 여기에는 ‘1·21사태(무장간첩 침투사건)’를 설명하는 비석이 있다. 북악산에 올라가면 당시 총격이 벌어진 곳에 ‘1·21사태 소나무’라는 표지판도 붙어 있다.

서울 밖도 마찬가지다.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다. 박 전 대통령 동상도 있다. 몇 년 전 광화문광장에도 박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고자 하는 단체가 있었고, 마포구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에도 세울 계획이 있었으나 반대가 심해 무산됐다. 구미의 동상은 2010년 초 바뀐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고압적인 느낌을 주는 동상에서 수수하고 털털한 동상으로 바뀌었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내가 태어난 네덜란드 레이던시에도 역사 흔적이 많다. 유명 화가 렘브란트의 생가 터에는 기념 명판이 붙어 있고 그가 어린 시절 다니던 학교 건물에도 표지판이 있다. 또 옛 도시의 문인 모르스포르트 안에는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이 청년은 1933년 베를린에 가서 독재자 히틀러를 반대한다는 표시로 당시 독일 의회인 라이히슈타크에 불을 질렀다. 그는 레이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 항상 좋거나 위대한 일만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서 많은 유대인이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살아 나오지 못했다. 몇몇 네덜란드 사람은 이 악행에 연루됐다. 이 불행한 사실을 레이던 시민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여행가방 모양으로 만든 조각들을 도시 다섯 곳에 세웠다. 특히 조직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했던 옛 경찰청 앞에도 있다.

한국에도 불행한 일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남산 기슭 서울유스호스텔 앞에는 일제강점기의 통감관저 터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그곳이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된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다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자택인 경교장은 건물 자체가 박물관이 됐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 로터리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라는 표지가 있다. 그리고 일본대사관 앞에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그런데 10·26사태(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를 기록한 비석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지난주 일요일 아내와 궁정동의 무궁화동산을 찾아갔다. 그 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들’이란 영화를 마침 전날 본 터였다. 현장을 찾아가 이리저리 살폈는데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그 대신 1640년 그곳에 살았던 김상헌의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1979년 그 자리에 있었던 건물 6채는 다 없어지고 공원으로 변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대 초 옛 안기부 가옥을 헐어 버리고 국민에게 개방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극의 유적지를 지우는 마음을 이해도 하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던 만큼 표지판이라도 남겨 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 무궁화 동산을 소개하는 약도도 있고 김상헌 시비(詩碑)도 있는데 10·26사태를 기록한 비석은 없었다. 미국 워싱턴에는 1865년 링컨 당시 대통령이 암살당한 포드 극장과 자택이 유적지로 보존돼 있다. 1963년 케네디 당시 대통령이 암살당한 텍사스주 딜리 광장에도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서 읽었는데, 김상헌 시비 뒤쪽 오른편에 굽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단다. 거기서 10·26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소나무도 좋지만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지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재코 즈위슬랏 호주 출신 NK News 팟캐스트 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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