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8일 이스라엘 경제 중심지 텔아비브에 위치한 텔아비브대(TAU). 정문을 지나 캠퍼스 안쪽으로 200m쯤 들어가자 모래색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트로이 목마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청동이나 대리석이 아닌 컴퓨터와 휴대전화 부품들로 만들어진 조형물이었다. 현지에선 ‘사이버 트로이 목마’로 불린다. TAU가 매년 주최하는 세계적인 정보보안 기술 포럼인 ‘내셔널사이버위크’를 기념하기 위해 2016년 세워졌다. TAU, 나아가 이스라엘이 강점을 보이고 선도해온 정보보안 분야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여겨진다. 6m 높이에 무게 2t인 이 조형물에 쓰인 부품들은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이 있는 컴퓨터와 휴대전화에서 가져왔다.
이스라엘 정보보안 산업의 경쟁력은 지난해 말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검찰이 백원우 전 대통령민정비서관 밑에서 특별감찰반원으로 일했던 고(故) A 씨가 사용하던 아이폰X의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이스라엘 정보보안 기업 ‘셀레브라이트’ 장비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도 테러와 마약 등 강력범죄자의 스마트폰을 분석할 때 셀레브라이트 장비를 애용할 정도로 이 기업의 기술력이 인정받고 있다. 인구 900만 명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처럼 정보보안 분야에서 뛰어난 기업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 적대 관계인 아랍국도 이스라엘 제품 사용
현지에서 만난 이스라엘 기업인과 정보보안 분야 전문가들은 기자에게 “셀레브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유명 기업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기업들이 매우 많다”고 자랑했다. 실제 ‘창업국가(Startup Nation)’로 불릴 만큼 첨단 과학기술 기반 창업이 활발한 이스라엘에서 정보보안 분야는 특히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시장 조사 회사 IVC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이스라엘에는 439개의 정보보안 관련 기업이 있다. 세계 500대 정보보안 기업 배출 숫자로는 미국(354개)에 이어 2위(42개)다. 2008∼2018년 이스라엘 정보보안 기업들이 유치한 투자금은 약 44억2000만 달러(약 5조1500억 원)다. 또 이스라엘 정보보안 기업들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의 전 세계 시장 점유율도 10%에 달한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약 70%에 달해 사실상 정보보안 산업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을 제외하면 이스라엘의 우수함이 단연 두드러진다. 이스라엘 일간지 ‘하아레츠’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정보보안 관련 상품은 적대 관계인 이웃 아랍 국가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현지 유명 벤처투자사(VC)인 버텍스벤처스의 야나이 오론 파트너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창업자들이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설립하고 있다”며 “유망 스타트업이 성장하면 이를 세계적 대기업이 인수하고,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돈으로 기존 창업주가 다시 새로운 스타트업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2018년 10월 애플리케이션 및 데이터 보안 기업인 ‘임페르바’는 21억 달러(약 2조4453억 원)에 유명 사모펀드 토마브라보에 인수됐다. 지난해 2월 미국 유명 보안업체 팰로앨토네트워크스는 인공지능(AI) 기반의 정보보안 기술을 개발하는 ‘데미스토’를 5억6000만 달러(약 6523억 원)에 인수했다.
○ 사이버전 담당하는 8200부대 복무 후 업계 진출
이스라엘의 정보보안 산업 경쟁력을 높여주는 또 다른 원인으로 ‘첨단 군대’가 꼽힌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때부터 과학기술을 이용한 전투력 강화에 공을 들여 왔다. 주변 아랍 국가에 비해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고, 국토도 좁기에 양적인 전투력 증강은 한계가 있다. ‘양’보다 ‘질’로 국가 안보를 지키겠다는 신념이 투철하다.
1952년 설립한 ‘8200부대’는 이스라엘이 국가 차원에서 정보보안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과학과 수학 인재가 주로 복무하는 특수부대로 사이버 전쟁을 담당한다. 적의 정보를 파악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정보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다.
정보보안에 관심이 많은 이스라엘의 젊은 영재들은 고교 졸업 후 이 부대에서 2, 3년간 군 복무를 한다. 이후 히브리대, 텔아비브대, 테크니온 같은 명문대에서 정보기술(IT) 관련 학과를 전공한 다음 산업계로 진출한다. 군(軍)→학(學)→산(産)으로 착착 이어지는 체계가 설립된 셈이다.
특정 기업이 해킹을 비롯한 각종 정보보안 문제를 미리 탐지할 수 있도록 하고, 관련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진화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사이버리즌’은 직원 대부분이 8200부대 출신이다. 창업 초기 활동했던 50여 명 중 90% 이상이 이 부대에서 복무했다. 500여 명이 근무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현재도 기술자 200명 중 절반이 같은 부대 출신이다. 특히 핵심 연구개발(R&D) 부서 인력은 전원 8200부대를 나왔다.
‘8200부대 동문 기업’으로도 불리는 이 회사는 일본 소프트뱅크와 미국 록히드마틴으로부터 각각 3억5000만 달러(약 4075억 원), 2500만 달러(약 292억 원)를 투자받았다. 굴지의 미국과 일본 대기업이 투자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요시 나르 사이버리즌 공동창업자 겸 최고비전책임자(CVO)는 “8200부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해킹을 막는다. 특히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형태의 해킹도 예측한다. 정보보안 분야에서 8200부대만큼 경쟁력 있는 인력을 꾸준히 확보해 교육한 뒤 다시 배출하는 조직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고교 동문, 대학 동문처럼 이스라엘에서는 소속 부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네트워킹이 펼쳐진다. 남녀가 모두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하는 데다 젊은 나이에 전장(戰場)에서 끈끈한 동료애를 쌓은 경험이 사회에서도 이어진다. 8200부대 동문회에서 여성 창업가 지원 활동을 하는 케렌 헤르스코비치 씨는 “공식 모임은 매달 열지만 이와 별도로 삼삼오오 모일 때도 많다. 부대원 대부분이 지금도 정보보안 기업에서 근무하기에 기술 협력, 투자, 채용 등 업무에 관한 다양한 정보 교류를 하고 업계 동향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 정부도 공격적 지원
정부도 정보보안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2010년 보안 전문가들을 모아 국가 사이버보안 정책을 만드는 태스크포스(TF)를 설립했다. 이후 총리실 산하에 정보보안 정책을 이끄는 조직 국가사이버국도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2014년부터 벤구리온대가 자리 잡고 있는 베에르셰바 지역을 정보보안 산업 중심지로 집중 육성해 왔다. 당시 벤구리온대 캠퍼스를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한 게 없었던 이 지역에는 현재 IBM, 오라클 같은 세계적 대기업이 정보보안 관련 R&D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관련 스타트업도 속속 모여들고 있다. 란 나탄존 이스라엘 국가브랜드팀장은 “대학, 기업, 군대가 함께 정보보안 관련 R&D를 진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산업 허브”라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실용 연구를 강조하는 이스라엘 대학의 연구 문화도 정보보안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샤크 벤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융합사이버리서치센터장은 “학계에서도 이스라엘을 상대로 해킹을 시도하는 것을 막는 기술을 적극 개발하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은 인력들이 졸업한 뒤 정보보안 업계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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