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 연휴 때 지인이 강력 추천한 중국 드라마 ‘사마의2: 최후의 승자’를 뒤늦게 ‘정주행’했다. 정주행은 원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바른 길로 가다’라는 뜻이지만 요즘은 드라마나 웹툰 등을 처음부터 한꺼번에 몰아 보는 것을 지칭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2017∼2018년 중국에서 방영된 45분짜리 44회 분량의 사마의2를 정주행한 결과 중드의 수준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사마의를 재조명하는 기본 스토리가 워낙 탄탄한 데다 배우들의 호연과 세련된 편집, 방대한 스케일, 소소한 유머 코드 등이 한국 드라마와 비교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중국 드라마의 대사가 유치하다는 편견도 깰 수 있었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고,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인내’ ‘오직 승리밖에 모르는 자들이 과연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등의 대사는 사마의의 명언 모음이라고 할 만했다. 670억 원의 제작비가 헛되게 쓰이지 않았다.
국내에선 설이나 추석 연휴 때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후배 한 명도 이번 설 연휴에 넷플릭스 드라마 정주행이 목표라고 했다. 꼰대 같을까봐 어떤 드라마냐고 묻진 않았지만 그는 “넷플릭스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다”고 말했다.
우선 TV 앞에 앉질 않는다. 지상파에선 설 연휴마다 감초처럼 들어갔던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이 거의 자취를 감췄고 명절 예능으로 꼽히던 MBC ‘아이돌 스타 선수권대회’는 3%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보였다. 아예 정주행 드라마를 편성표에 넣기도 했다. KBS는 인기 드라마였던 ‘동백꽃 필 무렵’을 연이어 볼 수 있게 편성했다. 물론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반면 섣달 그믐날(24일) 중국중앙(CC)TV 등이 주도한 춘완(春晩)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라는 명성을 톡톡히 과시했다. 한한령(限韓令) 이전엔 국내 아이돌들의 단골 출연무대이기도 했던 춘완은 올해 5G, VR 등 첨단기술을 접목했고, 전자상거래 업체 등을 끌어들여 세뱃돈과 경품을 나눠주는 등 더욱 화려하게 진행됐다.
최근 한류는 세계 문화에서 정주행하며 주류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BTS가 그래미상 시상식 무대에서 처음 공연하는 경사가 잇따르고 있다. 사극 드라마 ‘킹덤’이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 속편인 ‘킹덤2’가 제작되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엔터테인먼트 굴기나 넷플릭스의 국내시장 잠식을 염두에 두면 한류가 꽃길만 정주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불거진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이나 음원 사재기 의혹은 역주행의 전조처럼 느껴질 정도다. 국내 정상급 아이돌 그룹을 보유한 기획사의 관계자는 “많은 팬을 보유한 그룹이 신곡을 내놔도 1등 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팀원들이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습하고 준비한 결과가 고작 이 정도라는 점에 대해 자괴감을 느낀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창작 의지가 꺾인다는 것이었다.
한때 가요계에서 역주행은 좋은 뜻으로도 쓰였다. 대중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좋은 노래나 작품이 재발견돼 인기를 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뜬금없이 순위에 올라 음원 사재기 의혹을 받는 노래를 가리키기도 한다. 게임의 규칙이 이상하게 만들어지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가요계의 경우 굳이 실시간 차트라는 경쟁을 시키지 말고 빅데이터에 기반한 음원 추천으로 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한류가 정주행에서 역주행으로 일탈하지 않으려면 지금까지의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 말고 K팝에서부터 불거진 역주행의 경고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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