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권용득의 사는게 코미디]〈1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4일 03시 00분


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권용득 만화가
얼마 전까지 머리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 기르는 까닭을 물었다. 머리를 기른 게 아니라 한동안 이발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대답을 수차례 반복하다 나중에는 아예 목에 팻말을 걸고 다닐까 궁리하기도 했다. 가령 이런 식의 팻말. ‘제 머리요? 그냥 기른 거임! 아무 까닭 없음!’

해가 바뀌면서 머리를 잘랐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일이 지겨워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국물 요리 먹을 때마다 고개를 숙이면 흘러내린 머리가 국물에 자꾸 빠져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 이용할 때마다 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불편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공중화장실 이용할 때마다 내 뒷모습에 흠칫 놀라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날따라 시간이 남아돌았을 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왜 갑자기 머리를 잘랐냐며 궁금해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냥 자른 거임! 아무 까닭 없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신체 변화로 나보다 훨씬 큰 관심을 받는 사람도 있다. 휴가 중 성전환 수술을 받은 육군 전차 조종수 변희수 하사 말이다. 물론 변 하사는 나처럼 아무 까닭 없이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니다. 주변에 말 못할 고민을 오래 품어왔을 테고, 그 선택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군은 변 하사의 ‘중요 신체기관 상실’을 심신장애에 해당된다며 군복무를 계속 하고 싶다는 변 하사를 강제 전역시켰다. 변 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건 아닐 텐데, 군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득 ‘성전환도 내가 아무 까닭 없이 머리를 기르거나 자르듯이 쉬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전에 타인의 신체 변화에 왜들 이렇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걸까.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초등학교 동창 중에 변 하사처럼 트랜스젠더가 있다. 그 친구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동원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고향에 왔을 때였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그 친구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냈다. 그 친구는 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갔는데, 그 바람에 선생님한테 쉬는 시간에는 뭐했냐며 꾸중을 듣곤 했다. 친구는 그제야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친구는 그 무렵부터 남자애들과 화장실을 같이 이용하는 게 거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남자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하는 남성으로 강요받는 것 자체가 거북했든지. 전자든 후자든 나는 그 친구가 얼마나 거북했을지 헤아릴 수 없다. 게다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친구나 변 하사의 선택을 그저 존중할 뿐이다. 그게 그렇게 어렵나?
 
권용득 만화가
#트렌스젠더#성전환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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