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스럽게 잠투정하던 첫째 아이를 겨우 재우고 자정에 가까운 여름밤이었다. 육아에 지친 나와 남편은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각자 책 한 권을 골라잡아 읽기 시작했다. 김애란 소설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서 첫 번째 산문인 ‘입동’을 읽던 나는 어느샌가 펑펑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고, 자고 있던 첫째 아이의 이마에 안도의 입맞춤을 했다.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멀쩡히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고.
둘째가 태어난 후로는 퇴근을 하고 ‘육퇴’를 하기까지 너무나도 벅차 남편과 단둘이 조용히 저녁을 맞이했던 시간이 그립기도 하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러다가도 품안에 쏙 들어오던 아이의 몸집이 내가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때때로 시간은 정지한다. 그날그날의 너는 내 가슴에 오롯이 남아 있다. 내 품에 안겨 힘차게 울며 떨던 네 어깨, 미음을 먹었을 때 짓던 불가해한 표정, 아빠와 딸기를 두고 다투던 조막만 한 손.
사월, 그 바다에서 벌어진 일을 호명하는 것은 너무나도 괴롭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은 여전히 남의 일이지만 때때로 내 아이들과 이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금이야 옥이야 길렀을 아이들과 더 이상 이 계절을 함께할 수 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끝내 일어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겨야 하는지. 아이를 낳지 않는 아니, 결혼을 하지 않는 시대에 둘이나 낳았다고 누군가는 애국자라고 한다. 이왕 셋째까지 낳는 것은 어떠냐고 한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란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공정하고, 정의롭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하려면 나부터 달라져야 함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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