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에는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어 늘 적당한 습도의 맑은 바람이 분다. 또 걸어서 건너가기에 적당한 폭(약 30m)의 강이 도심을 관통한다. 호반을 따라서는 잔디밭이 펼쳐지고, 강변을 따라서는 마천루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호수는 그 도시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호수에서 발원한 강은 그 도시의 북쪽과 서쪽 경계를 이룬다.
시청은 도시 한가운데 있고, 도서관과 박물관은 호반 따라 펼쳐지는 푸른 잔디 광장 위에 있다. 이들 공공건축은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며, 격자형 도로망에 이정표 역할을 한다. 군데군데 광장을 두어 격자 도로를 이완한다. 그 도시의 호수와 강은 자부심이고, 수변은 긍지이며, 공공건축과 광장은 명예다. 도시의 이름은 시카고다.
시카고는 어쩌다 이런 멋진 물의 도시가 되었을까. 그 도시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을까.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1871년 대화재와 1893년 세계 박람회와 건축가 대니얼 버넘에 이른다. 대화재로 시카고 도심은 전소했다. 절망이었다. 하지만 시카고는 금세 일어섰고,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며 도시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람회의 성공과 그 영향으로 시카고만 백색 고전주의 양식의 도시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워싱턴과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백색 도시가 됐다. 박람회는 건축 도시 조경 측면에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세 가지가 돋보인다. 첫째 물길, 둘째 수변, 셋째 공공건축.
버넘은 박람회장(242만8113m² 규모)에서 바다만 한 미시간 호수와 기존의 크고 작은 석호를 다듬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물길을 만들었다. 그 결과, 물과 뭍이 깍지 낀 두 손 관계가 되어 베네치아처럼 다리가 생겼고, 수문 건축이 생겼다. 수변을 따라서 상큼한 조경과 넉넉한 보도를 줬다. 또 섬에는 숲을 조성했다. 수변은 선적인 조경이었고, 섬은 면적인 조경이었다. 이 두 조경은 건축과 하나가 되어 물의 형태와 경계를 완성했다. 이를 보면, 수변은 공공재라는 생각과 수변을 따라서는 보행 정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배어난다.
끝으로 버넘은 물길 축을 따라 땅의 위계를 부여했고 공공건축을 세웠다. 특히 ‘코트 오브 아너(Court of Honor·그림)’ 주변에 박람회 주요 앵커시설을 세웠다. 남쪽의 뱃길(낭만)과 북쪽의 철길(현실)은 대중교통 체계로 중심과 접속했다.
박람회가 끝난 후, 버넘은 건물 설계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시카고 설계에 15년간 천착했다. 그리하여 1909년 ‘시카고 플랜(Plan of Chicago)’을 출판했다. 박람회에서 발아한 3가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시카고에 적용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시카고 도시 디자인 바이블이다. 관전 포인트는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다.
첫째, 도시 흐름이다. 버넘은 찻길과 철길에도 주목했지만, 무엇보다 물길에 주목했다. 둘째, 수변의 활성화다. 그는 수변을 공공재로 인식했고, 그래서 호반 간척을 통해 도시 수변 길이를 늘여 공공공원을 두었다. 셋째, 시청과 박물관과 도서관과 극장과 수족관과 역사(驛舍)와 우체국 등과 같은 공공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설이다. 로마시대 기념비처럼 웅장하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에게 공공건축의 외부는 도시의 상징이어야 했고, 내부는 경외감을 불러야 했다. “작은 플랜은 버려라. 그것은 사람의 피를 휘젓는 마법이 없다.” 버넘의 입버릇이었다.
시카고는 대화재로 세계 박람회와 도시 비저너리 버넘을 발굴했다. 위기가 호기였으며, 이를 통해 시카고의 청사진이 나왔다. 그 청사진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도시의 성공 비결은 물길(흐름)과 물가(수변)와 (공공)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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