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햄프셔에서 마주친 민심… 분열된 美 적나라한 현주소[광화문에서/이정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7일 03시 00분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하얀 눈이 쌓인 미국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빽빽한 숲 옆으로 난 2차선 도로는 고요했다. 한동안 말없이 운전하던 우버 기사 로버트 페이건 씨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4년 더? 노(No)! 그가 재선되면 와이프는 심장병 걸릴 겁니다. 우리는 못 살아요. 그렇게 오래는 못 견뎌요.”

‘왜 그렇게 트럼프 대통령을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이 60대의 백인 남성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적 발언과 ‘우크라이나 스캔들’, 트위터 같은 것들을 언급했다.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은 범죄자를 뽑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운전대를 탁탁 쳤다. 평범한 미국 시민이 저렇게 현직 대통령을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의아해질 정도로 거친 반응이었다.

지난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 취재 현장에서 마주친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응은 페이건 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뉴햄프셔의 주도(州都) 콩코드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실비아 부도엔 씨는 “내 평생 이런 대통령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에 맞설 적임자는 누구라도 찍겠다”고 했고, 30대 여성인 트리샤 킹 씨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냥 다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게 뉴햄프셔의 전반적인 민심이었냐고? 천만에.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민주당 후보들의 유세전에 맞불이라도 놓듯이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 열기는 얼마나 화끈했는지.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감옥에 가둬라(lock her up)”는 1만2000명의 격렬한 연호는 광적이었다. 유세장이 꽉 차서 들어가지 못한 수천 명은 바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속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한밤, 한겨울의 컴컴한 추위 속 ‘TRUMP’가 박힌 그들의 빨간 모자 물결이 선명했다. 유세장에서 마주친 로버트 엠피 씨는 “이렇게 솔직하고 거침없는 대통령을 본 적이 있느냐”며 “그는 반드시 재선될 거다”라고 큰소리쳤다.

현실 정치는 기본적으로 51 대 49의 나누기를 감수해가며 권력을 가져가는 게임이다. 정책과 정견의 차이에 따라 나뉘고 결집한다. 그러나 미국의 선거 현장에서 마주친 것은 이를 넘어서는 극단의 분열이었다. ‘트럼프 대 반(反)트럼프’의 구도에서 터져 나오는 미움과 냉소, 경멸이었다.

정치의 분열은 국민의 분열을 가져온다. 이는 다시 정치권을 양극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갈가리 찢어진 민심과 정치는 정책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 경제 양극화에 10년간 30% 증가한 불법 이민자 문제 등으로 악화돼 온 분열 현상이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국면을 지나면서 사상 최악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 간 지지율 차이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넓게 벌어져 있다.

감정이 섞인 국론 분열은 정책 추진만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다. 증오범죄를 부추기고 사회문제를 악화시킨다. 미국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선거전이 뜨거워질수록 상호 비방과 공격은 더 거세질 것이다.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미국 분열상의 민낯이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미국 대선#뉴햄프셔#국론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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