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건설 수주 13년만에 최악… 국가프로젝트로 돌파구 찾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1일 03시 00분


[인사이드&인사이트]한국 수출역군의 민낯

한국 해외 건설 수주는 2012년 한화건설이 약 80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사업(왼쪽 사진)을 수주하는 등 2010년대 초 호황을 누렸다. 1976년 당시 현대건설이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이르는 공사비를 받으며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산업항. 한때 ‘수출 역군’으로 꼽혔던 한국 건설의 위상을 보여준다. 동아일보DB
한국 해외 건설 수주는 2012년 한화건설이 약 80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사업(왼쪽 사진)을 수주하는 등 2010년대 초 호황을 누렸다. 1976년 당시 현대건설이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이르는 공사비를 받으며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산업항. 한때 ‘수출 역군’으로 꼽혔던 한국 건설의 위상을 보여준다. 동아일보DB
이새샘 산업2부 기자
이새샘 산업2부 기자
“해외 수주요? 이제 안 됩니다. 가격은 중국이 치고 들어오고, 기술은 선진국 못 따라갑니다. 미래가 없어요.”

지난해 말 해외 건설 수주 실적이 심상치 않다는 기사가 쏟아질 무렵, 한때 해외 건설현장에서 활동했던 건설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평생 몸담아온 분야를 지켜보며 내린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비단 그만이 느끼는 현상은 아니다. 해외 건설 수주는 한때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이었지만 지금은 딴판이다. 해외 건설 수주 실적이 계속 가라앉는 것은 산업계의 노력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 고꾸라진 과거의 ‘수출 역군’

지난해 해외 건설 수주 성적표는 말 그대로 ‘바닥을 쳤다’. 지난해 총 수주액은 224억 달러(약 26조8000억 원). 13년 전인 2006년 165억 달러 이후 최악의 성적표다.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했던 2010년(716억 달러)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액수다.

이른바 ‘수주 텃밭’에서 성적이 처참했다. 지난해 중동지역 수주액은 48억 달러로 전년(92억 달러) 대비 절반 수준이었다. 2006년 95억 달러와 비교해도 ‘반 토막’이다. 한국 기업이 주로 많이 수주하는 플랜트(산업설비) 분야 역시 지난해 약 108억 달러로 2018년(184억 달러)의 절반가량이다.

한때 건설 산업은 한국의 ‘수출 역군’이었다. 1976년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산업항 공사는 한국 해외 건설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업이다. 이 사업의 공사대금은 9억30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4500억 원)였다. 공사 하나를 수주해 당시 한 해 정부 예산(약 2조 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이후 한국 건설산업은 해외 건설 수주 시장에서 꾸준히 성과를 거두며 성장했다. 2009년 삼성물산은 총 170층, 높이가 800m가 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칼리파 타워를 완공했다. 2012년 한화건설이 건설사 단독 수주액으로는 최대 규모(80억 달러·약 9조 원)인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사업(주택 10만 채 건설)을 수주했다.

하지만 2010년대 초 호황기가 찾아오자 한국 건설사들은 제대로 된 리스크 분석이나 손익 계산 없이 ‘묻지 마 수주’에 뛰어들었다. 이 탓에 2013년 이후부터는 건설사 사이에서 “해외 수주는 무조건 손해 본다”는 얘기가 돌았다. GS건설이 저가 수주로 2013년 1조 원의 손실을 내면서 건설사들도 무작정 경쟁에 나서기보다 선별적으로 사업을 수주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수주 실적 감소는 이 같은 ‘리스크 줄이기’의 영향도 있다.

○ 유가와 함께 움직여…대외 리스크에 취약

한국의 해외 건설 수주 실적은 유가와 함께 움직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주로 중동과 아시아 지역에서 석유화학 플랜트 수주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유가가 높아져 플랜트 건설이 늘어나면 수주액이 늘고, 유가가 낮아지면 다시 수주액이 줄어든다.

실제로 실적이 좋았던 2010∼2014년은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을 기록하던 시기다. 하지만 2015년 국제유가가 급락한 뒤 한국의 해외 수주 실적은 연간 60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 다시 200억 달러 수준으로 가파르게 하락했다. 저유가에 미중 무역분쟁, 미국의 이란 제재 등 여러 악재가 겹쳤던 지난해에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글로벌 건설시장은 부침을 겪었다. 2013년 5439억 달러에 이르던 해외 건설시장 규모는 2016년 4681억 달러로 줄었다. 하지만 2017년 4824억 달러로 다시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한국 해외 건설 수주액은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나라에 똑같이 작용하는 대외 리스크가 한국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한국 건설 산업의 경쟁력이나 포트폴리오 구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건설사의 가장 큰 무기는 어떻게든 약속된 시간 내에,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공사를 마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중국이 저임금 인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면서 효과가 떨어졌다. 한국의 건설산업 기술력은 여전히 미국 등 선진국의 80%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손태홍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 한국의 해외 건설 수주는 ‘묻지 마 수주’의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며 “생산성 향상, 업종 및 지역 다변화 등 글로벌 트렌드에 맞는 방향으로 사업 재편을 하기 위한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미중일, “해외 수주는 외교”

반면 다른 나라는 민관이 함께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해외 건설시장 진출은 국가 간에 원조를 겸한 투자개발협력 사업을 펼침으로써 국가의 영향력을 키우고, 장기적인 경제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미국은 2018년 해외 인프라 시장 진출 확대를 목표로 하는 미국 국제개발금융공사(USIDFC)를 설립했다. 자본금이 600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이전에는 해외민간투자공사(OPIC)가 개발도상국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돈을 빌려주는 역할만 했다면 앞으로는 대출은 물론이고 민간 기업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필요한 각종 보증, 보험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이 이처럼 인프라 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중국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 건설기업의 해외 매출액은 1141억 달러(2017년 기준)로 2014년 이후 세계 점유율 1위다. 국가 차원의 인프라 수출 정책, ‘일대일로’에 힘입은 것이다. 해외투자 심사 간소화, 각종 금융 지원 등 전방위적인 정부 지원에 힘입어 중국 국유기업이 참여한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만 전 세계 1700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한국에 시장을 빼앗기며 수주 침체기를 겪었던 일본 역시 2010년대 들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 개발에 성공해 나가고 있다. 일본은 2013년 새로 특별법을 제정해 인프라 관련 수출 규모를 2020년까지 3000억 달러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해외 인프라 투자가 점점 더 장기화하는 것에 발맞춰 무역보험의 보상 범위를 확대하고 해외투자보험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 등을 도입했다. 현재 일본은 아시아, 중동 및 아프리카가 주력이었던 과거와 달리 아시아와 북미지역 수주가 전체의 80%에 이르는 등 시장 다변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해외 건설 수주, 국가 프로젝트 돼야”

최근 한국 기업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분야가 바로 ‘투자개발형 민관협력(PPP) 사업’이다. 한국의 해외 건설 수주는 대부분 발주자가 모든 공사비를 대고, 시공사는 설계부터 공사까지 일괄 수주를 받아 지어주는 설계·조달·공사(EPC) 사업 형태였다. 하지만 이 분야는 중국, 인도 등 후발 주자들이 진입하며 가격 경쟁이 치열해졌다.

반면 PPP 사업은 발주자는 사업 제안과 함께 공사비 일부를 대고, 시공사가 사업에 필요한 나머지 자본금부터 공사 이후의 운영까지 도맡아 하며 장기간 수익을 거두는 사업이다. 아예 시공사가 발주자에게 사업을 발굴해 제안하기도 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05년 403억 달러였던 신흥 개발도상국 PPP 시장 규모가 2015년 1199억 달러로 대폭 커지는 등 자본금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이 발주하는 사업 가운데 PPP 사업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 PPP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기준 1.15%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된다. 타당성조사부터 자본금 유치, 향후 시설 운영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 인력이 필요한 데다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8년 유라시아해저터널 사업을 수주해 공사부터 운영까지 맡고 있는 SK건설은 최근 영국 실버타운 터널 프로젝트, 카자흐스탄 알마티 순환도로 사업 등 굵직한 PPP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SK건설 관계자는 “유라시아해저터널 사업을 수주해 10년 동안 사업을 운영해본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다른 PPP 사업에도 뛰어들 수 있는 것”이라며 “PPP 사업은 기업의 재정 상태, 금융 동원 능력, 과거 경험 등 다양한 요소를 보기 때문에 처음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지만, 일단 궤도에 오르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치열하다”고 말했다.

한국도 2018년 6월 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를 설립하며 해당 분야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정보 수집 및 국가별 진출 전략 수립, 기술 타당성 검토, 리스크 분석 및 금융 지원 업무 등 PPP 사업 전반을 지원하는 별도 기관이 처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KIND의 자본금 규모는 1900억 원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에 비하면 아쉬운 수준이라는 것이 일선 건설사들의 목소리다.

정창구 해외건설협회 해외건설정책지원센터장은 “2010년대 초반 호황은 민간 기업들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고, 해외 수주시장에서 개별 기업 역량만으로 과거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다른 나라처럼 해외 수주를 민간과 공공이 힘을 합쳐 수행하는 국가 프로젝트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새샘 산업2부 기자 iamsam@donga.com
#해외건설 수주 최악#국가 프로젝트#너트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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