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에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부모님이 계신 경북 왜관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게다가 어머니는 몇 주 전부터 인후통을 동반한 감기 증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걱정할까 봐 그 사실을 최근까지 숨겼고, 나는 어머니한테 얼른 검사부터 받아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일찌감치 정부 방침을 따랐던 모양이다. 감기 증상이 나타난 초기, 보건소에 문의했지만 별다른 안내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코로나19에 노출될 만한 외부 활동을 한 적이 없고, 당시 왜관에는 선별진료소도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어머니는 한동안 감기 증상을 상비약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인근 의원조차 병원 내 감염이 우려돼 감기 증상 환자는 일절 받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진료가 가능하다는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고 제대로 된 약을 처방받았다. 다행히 어머니의 감기 증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나는 어머니가 코로나19에 감염된 게 아닐까 두려웠다. 어머니가 소위 ‘슈퍼전파자’처럼 공분의 대상이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는 얘기다. 보건 분야 전문가들이 감염자 혐오는 방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아직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감염자의 동선과 행적이 가장 큰 관심사다. 간혹 정부 방침을 따르지 않은 감염자는 파렴치한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마침 국회에서도 관련 법 개정을 통해 감염병 검사와 역학조사를 거부하면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반면 그럴싸하게 편집한 정보로 혼란을 부추기는 사람은 통제할 방법이 없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정쟁을 부추기는 사람도 통제하질 못한다. 아무래도 방역 시스템과 공공의 안전에는 후자 쪽이 훨씬 더 위협적인 것 같은데 말이다.
‘스포트라이트’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 보스턴 글로브지 특종팀이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폭력 사건을 고발했던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다. 영화는 교단과 지역 사회 기득권이 해당 사건을 어떤 식으로 은폐했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무렵 특종팀 기자들은 수십 년 전에 성폭력 피해자의 제보가 이미 있었지만, 자사가 그 제보를 묵살하고 보도하지 않았던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자신들 역시 해당 사건 은폐에 일조했던 셈이다. 특종팀 기자들이 서로를 탓하며 자책하자 국장은 말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가요.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그 어떤 방역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 방역 시스템은 어둠 속에서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더듬어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불이다. 우리는 그 최소한의 불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다. 누구든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밑바닥을 비출 수도 있다. 아니면 탓할 대상을 골라내서 마음껏 헐뜯을 수도 있다. 그 최소한의 불을 어떻게 쓸지 그건 순전히 우리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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