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술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도 그렇다. 불편함은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숙주에 기생하면서 영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은 은유적으로 쓰이면 다른 사람에게 기생해 사는 사람을 나타낸다. 스토리는 이 불편한 제목이 암시하고 환기하는 것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프랑스 학자 제라르 주네트에 따르면 작품의 제목은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는 운명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제목은 문턱에 자리를 잡고 작품이 작가의 의도에 맞게 해석되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는 ‘내재적인 신조’이다.
그렇다면 제목이 말하는 기생충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반지하에 사는 가족이다. 기택, 충숙, 기우, 기정. 그들은 이름부터가 기생충의 ‘기’와 ‘충’을 차용한 알레고리적인 이름이다. 박 사장 집에 기생하는 서민들이 기생충으로 은유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극심한 빈부 격차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생각하면 꼭 그렇게 볼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가.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숙주이고, 부자들이 그들에게 기생해 부를 일구는 거라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보면 영화의 제목과 내용은 불편함을 넘어 일종의 역설이요 도발이 된다.
봉 감독도 이 영화가 불편한 내용이라는 것을 충분히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현대사회의 빈부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쓰라린 면을 관객이 불편해할 거라는 두려움으로 영화에 당의정(糖衣錠)을 입히고 싶진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관객이 느낄 불편함을 예상했음에도 정공법을 택해 일부러 제목부터 불편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설국열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불편한 영화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사유와 성찰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불편함은 그의 미학이자 정치학이었던 셈이다. 그의 영화가 건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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