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의 무게[이은화의 미술시간]〈10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7일 03시 00분


루치안 프로이트, ‘엘리자베스 2세’, 2001년.
루치안 프로이트, ‘엘리자베스 2세’, 2001년.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2003년 인기리에 방송된 드라마 ‘상속자들’의 부제로 쓰여 유명해진 말이다. 원래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대사에서 유래했다. 왕관을 쓴 자는 권력과 명예를 얻는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올해로 즉위 68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좌를 지킨 군주다. 언론에 비치는 여왕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품격과 위엄이 있는 모습이지만 루치안 프로이트가 그린 여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쓸쓸한 표정과 주름진 얼굴은 외로운 여느 노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머리에 쓴 왕관은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인다.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평생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지만, 생애 딱 한 번 예외적으로 권력자를 그렸다. 이 초상화는 화가가 먼저 제안하고 여왕이 수락해 진행됐다. 세로 20cm밖에 안 되는 작은 초상화를 위해 여왕은 19개월 동안 모델을 서야 했다. 당시 79세였던 화가는 75세의 여왕을 처음에는 왕관 없이 그렸다. 화려한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군주 모습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화하지 않은 여왕의 초상은 여왕 같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화가는 왕관을 그려 넣기 위해 캔버스를 3.5cm 위로 연장시켰다.

완성된 그림이 공개되자 영국민들은 반으로 분열됐다. 여왕을 늙고 못생기고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화가를 런던탑에 가둬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반면에 나이 든 군주의 이미지를 가식 없이 표현했고 여왕의 심리를 꿰뚫은 초상이라는 찬사도 쏟아졌다.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로 유명한 여왕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림은 조용히 왕실 컬렉션에 소장됐다. 왕실 수장으로서 여왕이 짊어진 고뇌와 책임감의 무게를 알기에 화가는 그녀의 왕관을 유난히 크고 무겁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루치안 프로이트#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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