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탄생은 전염병과 관계가 깊다. 한나라의 명의 장중경(張仲景·150∼219 추정)의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은 전염병으로 죽어간 가족의 치료 처방을 모은 것이다. 장중경은 동양의학의 시조이자 ‘의성(醫聖)’으로 추존되는 인물로, 상한잡병론은 동양 임상치료학의 명저다. 조선의 한의학도 전염병과 싸우면서 발전했다. 신체 방어기제인 ‘면역(免疫)’이란 용어조차 역병(疫病), 즉 전염병을 이긴다는 뜻이다. 그만큼 조선시대는 치열하게 전염병과 전쟁을 벌였다. 조선 왕실의 본격적인 투쟁 기록은 태종부터 시작한다. 태종 18년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이 두창의 일종인 완두창(豌豆瘡)에 걸려 위독해졌다. 태종의 명으로 승정원에서 부른 점쟁이들은 병이 호전되리라 예측했다. 그럼에도 성녕대군이 사망하자 태종은 무속을 배격하고 이성적 방식을 뿌리내렸다. 심지어 직접 의서를 읽으며 처방을 분석해 어의들의 오진을 탓했다.
태종의 노력은 조선 중기에 빛을 발한다. 숙종의 두창을 조선의 독자적 치료법으로 극복해낸 것이다. 숙종은 재위 9년 10월 18일 두창에 감염돼 몸져누웠다. 이미 5일 전부터 한양을 집어삼킨 두창은 궁에도 침범했다. 혼수상태까지 온 숙종의 두창은 ‘화독탕’을 투여하면서 급격히 호전됐다. 열이 가라앉기 시작해 10월 29일에는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완치됐다. 주목할 사실은 두창이 가장 심할 때 사용한 사성회천탕이 중국 그 어느 의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 이는 조선 중기 명의 전유형이 만든 처방이었다.
현대의학처럼 빠른 격리를 통해 추가 감염을 막은 왕도 있다. 현종은 자신의 딸 명선공주가 두창에 감염되자 “오늘 안으로 경덕궁으로 옮기겠다. 왕세자와 세자빈을 먼저 가게 하라”고 지시했다. 반면 영조는 빈궁에게 홍진(紅疹)이 생기자 “별일 없을 것”이라고 버티다 신하들의 경고로 거처를 옮겼다. 조선 후기 왕실의 두창과 홍역 치료법은 더욱 발전한다. 홍역에 걸린 순조 부부는 가미승갈탕과 가미강활산을 처방받고 17일 만에 완쾌했다. 순조 5년에는 다시 두창을 앓았지만 27일 만에 완치됐다.
전염병은 세균과 바이러스 등 병원체와 인체가 벌이는 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비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예방이다. 세시풍속 중에는 예방법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1525년 중종 때 발행한 의서 ‘간이벽온방’에는 “설날에 파, 마늘, 부추, 염교, 생강 등 다섯 가지 매운 음식을 먹을 것, 붉은 팥을 먹을 것, 창포술에 웅황을 개서 먹을 것” 등을 적고 있다. 붉고 매운 것이 체온을 끌어올려 병마의 침입을 막는다고 본 것이다. 세종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으로 “매일 이른 아침과 자러 누울 때 코 안에 참기름을 바르라”고 권했다. 점액 역할을 하는 참기름으로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통로인 코를 보호한다는 경험방이었다. 면역력은 몸 전체의 건강 상태와 밀접하다. 면역이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군대라면 면역체계를 확립하는 흉선은 국방부다. 젊은 흉선을 노인에게 옮기면 얼마 가지 않아 노화하지만 거꾸로 청년에게 이식된 노인의 흉선은 시간이 갈수록 젊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면역력을 키우려면 평소 건강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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