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수 청백 공동법률사무소 변호사만화 ‘슬램덩크’의 명대사가 있다. “영감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누가 나에게 영광의 시대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이전까지는 언제라고 대답할까 고민했겠지만, 이제는 단언해서 말할 수 있다. 내 영광의 시대는 2020년 2월 17일 낮 12시 16분, 올해 들어 이례적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도래했다.
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게 되는 날이 있다. 2월 16일은 오전부터 장모님, 장인어른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브런치를 먹고, 저녁엔 부모님을 뵙고 왔으며, 집에 와서 혼자 대청소를 하였기 때문에 피곤한 하루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내 뒤척이다가 새벽 2시 42분 아내의 진통이 심해져 산부인과 병원으로 갔다는 장모님 전화를 받았다.
장모님 전화를 받고 10분 만에 튀어나갔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있었다. 내 자동차는 후륜구동 방식이라 눈에 취약한데 체인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브레이크를 잡으니 차에서 ‘드드득’ 소리가 나며 말을 듣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차가 뒤뚱거리면서 밀려나기까지 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20k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고속화도로를 거쳐야 했다.
중간에 내려 택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으나, 거리에 택시는 고사하고 다니는 차 자체가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으니 비상등을 켜고 시속 30km를 유지했다. 식은땀이 줄줄 났다. 휴대전화와 연결된 자동차에서는 가수 이찬원의 ‘진또배기’가 흘러나왔다. 헛웃음이 났다. 겁이 났지만, 밤새 소복하게 쌓인 눈을 뽀드득 밟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상황을 합리화했다.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병원에 도착하니, 장모님은 병원에서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배우자 외 출입을 금지해 분만실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계셨다. 분만실에서 이 상황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고 있는 아내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나는 분만실로 들어가서 아내의 무서움을 덜어주고자 차에서 들었던 ‘진또배기’를 개사해서 불러줬지만, 아내는 웃을 힘도 없다고 했다.
나는 분만실에서 11시간의 출산 과정을 모두 지켜봤고, 아내는 단 한 번도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평소에 아내가 독하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어쨌든 아기는 너무나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났고,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탯줄을 잘랐다. 희한하게 태어난 아기는 눈을 반쯤 뜨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내 영광의 시대는 이렇게 도래했다.
뉴스에서 출산율이 해가 갈수록 낮아진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다. 나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출산을 권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아기의 탄생은 더할 나위 없는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고, 그 희열은 숱한 고민과 걱정을 한순간에 무력화시켰다. 만약 누군가 출산을 고민하고 있다면, 그 최종 결정에 대체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희열을 꼭 고려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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