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백화점-대중음식점 ‘직격탄’… 아베노믹스 꺾일까 불안
도쿄 올림픽 연기 우려도 고조
극소수 최고급 식당 여전히 호황
세계적 명품 브랜드와 고급 식당이 밀집한 일본 도쿄 긴자는 부(富)와 권력을 상징한다. 극소수 회원만 드나들 수 있는 술집, 한 끼에 5만 엔(약 55만 원)이 넘는 최고급 스시 음식점 등이 즐비하다. 2000년 4월∼2001년 4월 집권한 모리 요시로(森喜朗·83) 전 총리는 불과 1년의 재임 기간 중 90차례나 긴자의 술집과 일식집 등을 드나들어 구설에 올랐다. 그만큼 권력자들이 사랑하는 장소란 뜻이다.
이처럼 긴자의 화려함은 특히 밤에 빛을 발한다. 검은색 대형 승용차에서 내려 고급 클럽으로 들어가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비즈니스맨이 넘쳐 난다. 제대로 차려입고 가지 않으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절로 위축된 기분이 든다.
이런 이유로 긴자는 일본 경제의 바로미터 역할을 해 왔다. 경제 상황 변화를 가장 빠르게 체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공포에 떨고 있는 지금, 긴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중국어가 사라진 긴자
이달 2일 점심 무렵 대형 쇼핑몰 ‘긴자식스’에 들렀다. 1층의 크리스찬디오르, 발렌티노, 셀린느, 피아제, 로에베 매장 등에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세금을 환급 받으려는 외국인 쇼핑객들이 들르는 면세 카운터에도 손님 없이 직원 4명만 보였다. 늘 사람이 북적이던 곳이라 살짝 기괴한 기분마저 들었다.
지하 1층 뷰티 매장으로 내려갔다. 약 6000m² 면적에 화장품 업체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손님은 단 3명이었다. 코로나19 감염 우려로 화장 시연도 꺼리는 분위기다. 시연 공간엔 거울만 늘어서 있었다.
매장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방독면과 흰 장갑을 착용한 한 남성이 장갑을 낀 손으로 스마트폰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일본의 코로나19 공포가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었다.
창업 150주년을 맞아 이달 6, 7일 기념행사를 개최하려 했던 마쓰야백화점 정문 앞에는 ‘행사를 부득이하게 취소한다’는 문구가 붙었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여파로 민간에 대규모 행사 자제를 요청한 탓이다. 일부 손님은 안내원에게 “진짜 취소된 것 맞느냐”고 물었다.
기자 주변의 일본인들은 “긴자에서 중국어가 안 들린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넘쳐 나는 중국인 관광객이 최고급 가방, 시계, 보석류를 싹쓸이했지만 지난달부터 중국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 해외 관광객 감소·내국인 재택근무 이중고
실제 긴자의 유통 및 소매업계는 심각한 코로나19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미쓰코시백화점의 지난달 매출액은 2019년 2월보다 15.3% 줄었다. 특히 긴자점은 36.2% 감소했다.
긴자의 주요 매장은 해외 관광객 감소, 내국인의 재택근무라는 두 가지 악재를 동시에 만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달 27일 136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50% 기업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80%는 “환영회 등 회식을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긴자 인근에 있는 일본 최대 광고업체 덴쓰도 지난달 직원 한 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에 지난달 26일부터 5000여 명의 직원이 모두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이런 여파가 긴자 식당가에 고스란히 미치고 있는 셈이다.
중저가 매장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긴자 초입 미유키거리에 있는 스시 체인점 ‘스시잔마이’는 점심시간인데도 좌석 절반이 비었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과 함께 앉는 카운터석은 15개 좌석에 2명만 자리했다. 종업원은 “얼마 전만 해도 점심 때 회사원들이 몰려와 긴 대기 줄이 있었다. 요즘은 손님보다 빈자리가 더 많다”고 토로했다. 1000∼2500엔 정도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인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안 음식점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 경기침체 우려 고조
긴자 상인들은 지난해 4분기(10∼12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쇼크가 가시기도 전에 코로나19 악재가 닥쳤다는 점을 특히 우려하고 있었다. 위기가 겹쳐 장기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가득하다는 의미다.
지난달 일본 정부는 4분기 성장률이 ―1.6%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나타낸 것은 2018년 3분기(7∼9월) 이후 5개 분기 만이다. 지난해 10월부터 단행된 소비세 인상, 미중 무역갈등 여파 등이 작용한 결과다.
코로나19 악재까지 겹친 올해 1분기(1∼3월) 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보다 더 안 좋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실제 2월 일본의 신차 판매 대수는 2019년 2월보다 10.3% 감소했다. 일본 각지의 전통여관 3∼5월 예약은 전년 동기 대비 45.2% 줄었다. 올해 1분기에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면 일본은 2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뜻하는 경기침체(recession)에 진입한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 대응할 만한 수단이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3일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긴급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0.5%포인트 낮췄다. 미국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해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 9·11테러가 일어난 2001년 등 중차대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만 0.5%포인트 인하를 단행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을 그만큼 우려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은행(BOJ)의 기준금리는 이미 마이너스여서 금리 인하의 효과가 크지 않다. 또 국가부채 비율은 약 215%로 독보적인 세계 1위다. 위기에 대처할 만한 공격적인 통화 및 재정정책을 집행하기 어려운 구조다. 크루즈선 ‘프린세스 다이아몬드’호의 집단 감염에 대한 미숙한 대처에서 보듯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리더십 부재도 심각하다. 즉, 코로나19가 단기 악재로 끝날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제 상황 개선에 대한 기대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 일본인의 걱정을 더 키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도쿄 올림픽을 기다리지만…
일본 사회가 이런 상황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올해의 최대 행사 ‘도쿄 올림픽’마저 연기설에 휩싸였다. 정부는 당초 올해 올림픽으로 약 4000만 명의 해외 관광객이 일본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긴자 상인들 역시 ‘지금은 힘들지만 올림픽 때까지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수백만 명의 여행객이 먹고 쇼핑하는 돈이 긴자로 흘러들어오면 ‘코로나19 쇼크’를 단시간에 만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긴자에서 7년 동안 한식당 ‘윤가’를 운영했던 주현철 대표는 “서양인들이 명품, 세계 각국의 식음료, 고급 식당 등 긴자만의 콘텐츠와 서비스를 경험하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긴자 상인들은 올림픽 연기 혹은 취소 뉴스에 유달리 민감하다.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는 “만약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면 코로나19, 미중 무역갈등, 소비세 인상보다 더 큰 충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쿄 호텔은 매물이 나오자마자 최고가로 팔릴 정도로 올림픽 특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며 “그런 올림픽이 취소되면 소비심리가 얼어붙으면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와 같은 경제 충격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취재를 마치며 일본 최고 초밥집으로 평가받는 긴자의 ‘스키야바시지로’ 예약을 시도해 봤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13회 연속 미슐랭 최고 등급 ‘3스타’를 받았고, 2014년 일본을 국빈 방문한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들러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이곳은 일반인의 예약이 워낙 어려워 올해부터 아예 미슐랭 평가 대상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더 유명해지고 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웹사이트에는 ‘좌석 10석이 다 차 예약이 어렵다. 당분간 전화 예약을 받지 않겠다’는 문구가 있었다. 코로나19의 영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긴자의 일반 매장과 완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짙은 양극화의 그림자가 역설적으로 긴자가 정말 위기를 맞았음을 느끼게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