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하정우 김남길 주연의 공포영화 ‘클로젯’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나도 안 무서워서요.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뒤 탄생한 소녀귀신이 벽장에서 훅 튀어나오는데, 얘가 “끼야아아오” 하고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화들짝 놀라게 될 뿐, 근원적 공포가 느껴지질 않았거든요.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건 공포가 아니에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왜 아까 전화 안 받았어?” 하고 묻는 아내의 눈빛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 명실상부한 공포이지요.
사실, 요즘엔 일상 자체가 ‘공포물’이다 보니 공포영화가 영 재미없어요. 그래서 귀신보다 무서운 게 ‘당기시오’라는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농담도 돌아요. 출입문에 붙은 당기시오란 팻말을 보는 순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잔뜩 묻어 있을지도 모를 손잡이를 쥐어야 한다는 공포가 엄습하지요. 톱클래스도 아닌 남자 배우가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써달라며 100만 원을 기부했다가 ‘액수가 너무 적다’는 비난 세례를 받는 것도 시대의 공포이고, 여배우가 SNS에 “재앙과도 같은 이 힘든 시기를 우리 모두 잘 이겨내 봐요! 힘내세요!”라는 글을 올렸다가 “‘재앙’이란 단어 선택의 저의가 의심된다. 너 일베냐?”는 악플로 융단폭격을 당한 뒤 계정을 비공개로 돌린 일도 오싹한 공포이지요. 신경쇠약 직전의 사람들이 ‘어디 탓할 놈 없나’ 하고 눈이 벌건 채 인터넷을 좀비처럼 몰려다니며 뿜어내는 광기는 어떤 바이러스보다 무서워요. 이런 집단 히스테리 속에서 트럭 가득 마스크를 싣고 대구로 내려가 “의리!”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준 배우 김보성이야말로 ‘슈퍼히어로 무비’로 시대의 장르를 잠시나마 바꿔준 어벤져스 같은 존재라는 생각도 해봐요.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 이렇게 더 살다간 아예 돌아버릴 것만 같아요. 며칠 전 극장에 ‘인비저블맨’이란 공포영화를 보러갔을 때의 일이에요.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려 드는 정신이상 ‘집착남’에게서 가까스로 탈출해 친구 집에 숨어든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뻔한 영화를 보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물론 영화 때문이 아니었어요. 요즘엔 감염 걱정에 다른 관객들로부터 최대한 떨어진 ‘격리된’ 좌석을 고르는 습관이 생겼는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텅 비어 있던 내 뒷줄에 씻지도 않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마스크도 안 쓰고 턱 앉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얼른 일어나 맨 앞줄로 도망갔는데, 이번엔 좌석의 젖혀진 방석 부분이 내려가질 않아 앉을 수가 없는 거예요. 검표 없이 관객을 들여보내는 ‘자율입장제’를 운영하는 극장 중 일부는 구매한 좌석에 한해서만 의자의 좌대가 내려가도록 만든 이른바 ‘스마트 좌석’(이게 왜 ‘스마트’인지 모르겠지만)을 운영하는데, 내가 바로 그 스마트 좌석의 희생양이 된 거죠. 아! 그 순간 관람 중인 영화보다 100배 더한 공포가 밀려왔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맨 뒤로 가서 서서 봤어요.
진짜 공포는 미지(未知)의 대상이 아니라, 주지(周知)의 대상으로부터 오는 법이에요. 그게 무슨 유식한 말이냐고요? 우리는 모르는 대상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니라, 익히 아는 대상이 우리의 신뢰를 배신할 때 더욱 본질적 공포를 느낀단 얘기죠. 바로 ‘스릴러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이론이에요.
히치콕이 나오기 전까지 영화 속 공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 2시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검은 우비 차림의 정체불명 남자가 “쿠와악!” 하는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들고 내게 달려올 때 생성되는 감정이 당시까지의 ‘공포’였지요. 하지만 히치콕은 공포의 개념 자체를 뒤집었어요. 그건 그저 놀라는 것일 뿐 진짜 공포가 아니라는 얘기죠.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따스한 햇볕 내리쬐는 5월, 평화롭기 짝이 없는 한강공원에서 마주친 ‘천사표’ 직장 동료가 “아, 여기서 마주치네요. 정말 반가워요”라며 다가온 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는 당신을 위한 나의 작은 선물”이라며 안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내 휘두르는 순간 내가 마주하게 되는 당혹스럽고 절망스러운 배신감이야말로 근원적 공포라는 새로운 주장이었어요. 와우, 기대와 믿음이 배신당할 때 진짜 공포가 시작된다니! 정말 탁월한 통찰력이지요?
어쩌면 요즘 우리들이 느끼는 공포는 이런 ‘히치콕적인’ 공포인지도 몰라요. 1000원짜리 마스크 몇 장 사자고 우체국이 무슨 맛집인 양 줄을 서서 한나절씩 기다리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우린 깨닫게 되니까요. 촛불을 들었던 우리는 강했지만, 개인으로서의 나는 얼마나 연약하고 초라하고 굴욕적인지 말이에요. 우린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희망을 배신당한 현실을 무서워하고 있는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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