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난 후 다시 일어선 정재엽 씨(46)였다. 얼마 전 소식을 전해온 그에게서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2013년 회사 부도를 맞은 후 고통을 견뎌낸 과정을 담은 책 ‘파산수업’(2016년)을 출간했다.
어둠만으로 가득 찬 긴 터널을 지나게 해준 건 책, 정확히는 문학이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힌 채 욕설을 들을 때도, 법원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그의 주머니에는 책이 꽂혀 있었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자신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세라가 고난을 이겨내는 ‘소공녀’, 가난하지만 작은 행복을 찾고 미래를 꿈꾸는 ‘작은 아씨들’에 몰입하다 보면 그 순간만이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어떤 답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니 절망이란 게 뭔지 알겠더군요. 부여잡을 수 있는 뭔가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안간힘을 쓴 끝에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했다. 지금은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졸업생 대표로 연설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졸업식이 취소되는 바람에 연설을 못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래도 이런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기쁘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가 읽었던 작품의 작가들은 알았을까. 자신의 글이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던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걸.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도 힘을 준다. 오랜 기간 남편의 병간호로 몸과 마음 모두 기진맥진했던 한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사방을 둘러봐도 기댈 곳 하나 없는 것 같았어요. 그때 어릴 적부터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며 말했어요. ‘(신께서) 나중에 한 보따리 주실 거야’라고요.”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던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신기하게도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주문처럼 “한 보따리 주실 거야”를 되뇌며.
불안과 공포가 일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예민함과 분노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무언가가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해 보인다. 그 무언가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만 한마디 말, 한 구절의 글 또는 한 권의 책이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의미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머릿속 한편에 담아두었으면 좋겠다. 말과 글의 잔향은 오래도록 남아 삶의 고비, 고비마다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될 것이다. 그 언덕은 생각보다 든든할지 모른다. 말과 글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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