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 은평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A 씨는 끝내 말끝을 흐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고민 끝에 ‘공적 마스크’ 판매를 그만두려고 한다”고 했다. 환갑이 지난 A 씨는 그간 열심히 마스크 판매에 헌신해 왔다. 밤늦게까지 약국을 열고 밀려드는 고객들에게 마스크를 팔았다. 하지만 홀로 신분증을 확인하고 전산시스템 입력까지 도맡다 보니 몸에 한계가 왔다. 그는 이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몸살이 심하게 왔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요. 그래도 약사인데 몸이 이렇게 나빠진 게 살면서 처음입니다.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골고루 나눠 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꾹 참았는데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네요. 동료 약사들에게도 미안하고…. 마음이 너무 불편하네요.”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마스크 대란’이 이어지자 9일부터 약국 등에서 공적 마스크를 나눠 주는 ‘마스크 5부제’를 시행했다. 그런데 현장에선 시행 나흘째인 12일까지 A 씨처럼 공적 마스크 판매를 포기하는 약사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 공적 마스크 판매를 그만둔 약국은 전국에서 200곳을 넘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들을 이 지경으로 내몬 걸까. 약사들은 하나같이 공적 마스크 판매를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쉴 틈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지며 스트레스에 트라우마까지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판매 업무로 벅찬데, 몇몇 고객은 마음의 상처까지 줬다. 끊이지 않는 구매 줄과 아우성. “마스크가 왜 없냐”며 고성을 지르는 어르신. 배달 온 마스크를 묻지도 않고 먼저 뜯어가 버리는 고객…. 게다가 일반 약을 조제하러 온 고객들의 불만까지. 한 약사는 “밤에 잠도 잘 못 잔다. 악몽을 꾸다가 깬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뭣보다 연세가 지긋한 약사들이 마스크 판매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체력적인 문제도 컸지만, 익숙지 않은 전산 시스템을 다루느라 심리적 압박도 엄청났다. 일흔이 넘은 한 약사는 “판매 과정도 너무 복잡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데, 실수해서 욕이라도 먹을까 봐 하루하루가 불안했다”고 했다.
시민들로선 섭섭할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약사들에게 공적 마스크 판매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그런데도 판매에 나선 건 고통을 함께하려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실제로도 묵묵히 판매를 이어가는 약사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공적 마스크를 포기한 약국은 1%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 약사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버티곤 있지만 솔직히 모르겠어요. 한 동료 약사는 한 번 포기했는데 ‘왜 마스크를 안 파느냐’고 고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디다. 저도 너무 힘들어서 관두려다가 당국에서 ‘관두면 안 된다’고 하도 종용해서 그냥 하는 거예요. 솔직히 협박처럼 들려서 되게 서운했습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기대하는 게 너무 큰 바람일까요.”(B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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