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10년 동안 이어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입과 발의 자유를 제한당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나아졌지만 ‘경계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수 진영 내에서도 그의 정책과 철학을 공격하거나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중국식 개혁개방론’은 대표적인 시빗거리였다. ‘한국이 중국과 잘 지내면서 북한을 중국식으로 개혁개방시켜야 한다’는 황 전 비서의 주장에 ‘중국공산당처럼 조선노동당을 존치하자는 뜻이냐’는 반박이 뒤따랐다. 일부는 그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조화를 강조하는 주체사상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달 12일 시작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공격도 처음에는 새로운 게 아닌 듯했다. 미래통합당의 러브콜을 받던 김 전 대표가 태 전 공사의 지역구 공천을 두고 “국가적 망신”이라고 말했을 때 첫 의문은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였다. 태영호의 정책인가? 철학인가? 나중에 드러난 답은 ‘출신’이었다. 태영호는 이를 ‘뿌리론’이라 했다.
김 전 대표는 자신이 지핀 논란이 커지자 “태영호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를 지역구에 공천한 것이 문제”라고 물러났다. 과거 새누리당의 조명철 의원처럼 비례대표 정도면 족하지 탈북자를 지역구에 공천한 것은 문제라는 취지였다. 이에 대해 태영호 캠프는 대한민국 헌법을 무기로 들고나와 반격에 나섰고 김 전 대표는 결국 미래통합당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태 전 공사는 12일 오후 첫 반박 보도자료에서 “나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과 법률에 의해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정당의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며 헌법을 처음 언급했다. 이어 “자유와 시장경제의 고귀한 가치를 찾아 사선을 넘은 저는 자유시장경제의 상징인 강남갑을 위해 다시 한번 죽음을 각오하고 도전하고 있다”며 헌법이 담은 가치를 선거운동에 활용했다. 김 전 대표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13일 페이스북 성명에서도 “대한민국 헌법 혹은 선거법 조항을 읽어보아도 어떤 사람은 지역구 의원에 적합하고 어떤 사람은 비례대표가 적합하다는 규정도 없고 기준도 없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고 통일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호소했다.
애초에 탈북자인 그를 현실 정치에 들여놓은 계기도 헌법 논쟁이었다. 그는 11일 출마 선언을 통해 “북한에서 여기에 내려왔던 청년들이 범죄자냐 아니냐에 앞서 그들을 북한에 돌려보낸 사실을 보며 큰 좌절감을 느꼈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의정 활동을 해야겠다는 뜻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헌법에 따르면, 송환된 북한 어부나 태 후보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대한민국 국민이다. 어부를 수사나 재판도 없이 사지로 돌려보낸 것이나, 탈북자를 지역구에 공천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은 헌법 정신과 맞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년 동안 헌법 3조의 영토 조항과 4조의 통일 조항(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은 사문화되어 가는 분위기다. 2018년 이후 김정은의 위장 평화 공세에 ‘남과 북이 각각의 나라로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평화공존론이 통일당위론을 압도하고 있다.
‘김종인의 뿌리론’이 일부 유권자들의 정서일 수는 있다. 그것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선거 결과로 밝혀질 것이다. 이에 상관없이 김종인과 태영호의 이번 논쟁은 ‘분단 상황과 헌법 정신’이라는 주제를 다시 공론장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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