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교환학생 시절, 내겐 괴짜 같은 버릇이 하나 있었다. 캐리어 싸기. 인종차별이 있던 미국 중부의 외진 도시, 어른 키만큼 눈이 쌓인 1월의 기숙사는 내 마음만큼이나 추웠다. 이유 모를 시선과 키득거림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고 겉돌던 나날. 다 포기하고 내 나라, 내 가족에게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차올랐다. 그럴 때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짐 싸기였다. 들고 왔던 캐리어 하나에 딱 들어갈 만큼의 짐만 남기고 모조리 버리는 것. 그렇게 짐 하나만 달랑 남기고 흔적을 지워버리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지면서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하는 마음이 일곤 하는 것이었다.
그땐 그저 단순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자 ‘버리기’라는 행위가 주는 쾌감이려니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었다. 떠남을 준비하듯, 내게 속한 물건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응시하고 덜어내는 것. 그러다 보면 종래에는 꼭 유언 같은 물건들 몇 개만이 수중에 남았다.
이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커다란 봉투를 들고 집 곳곳을 누비며 버려 마땅한 물건들을 찾는다. 봉투 한가득 올해 한 번도 손이 가지 않았던 옷이나 언젠가 보겠지 하고 놔두었던 책, 왠지 버리기 아까워 모아두었던 잡동사니들을 쓸어 담다 보면, 해묵은 잡념들도 함께 정리가 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는 한 단계 더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비단 살림 버리기를 넘어, 휴대전화와 클라우드 가득 차 있는 사진 버리기, 나아가 따로 연락 한 번 해 본 적 없는 혹은 누군지조차 모르는 주소록과 메신저의 연락처 버리기까지. 그동안 그냥 내버려 뒀던 것이 신기하리만큼 낯선 무질서가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 다만, 물건 버리기가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라면 연락처 버리기는 약간의 죄책감을 수반했다. ‘그래도 혹시, 연락 오거나 연락할 일이 있지 않을까?’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하는, 입에 붙지 않는 단어 같은 생경한 이름들 위를 손가락을 댄 채로 배회하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언젠가 휴대전화 연락처를 통째로 날린 적이 있었지만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실생활에서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 극히 일부이듯, 연락처 또한 사실은 그러했다.
미니멀리즘 열풍을 일으켰던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말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 존재한다. 먼저 무엇에 둘러싸여 살고 싶은지 왜 그렇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야 한다.” 이는 비단 물건에 국한된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생활 나아가 삶 전반에 대해 나만의 시선, 기준을 가지고 내 주변을 내게 소중한 물건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관계들로 채워 나가는 것. 행복은 결국 이 단순한 미션의 성취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던가. 전 세계가 강제 ‘집콕’을 앓고 있는 코로나19 시대, 새 마음, 새날에 내어줄 심신의 공간을 ‘버리기’를 통해 미리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 비는 시간은 많고 불필요한 만남은 적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은 없다. 머지않아 분명히 올 봄, ‘진짜 봄’을 그리며, 오늘도 먼지 쌓인 집과 마음을 쓸어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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